윤일현

지성교육문화센터이사장

오후 마지막 시간에 예고된 용의 검사가 있었다. 그 전날 소여물을 끓인 후 물을 데워 때를 불리고는 돌멩이로 손등을 문질렀다. 워낙 켜켜이 쌓인 때라서 한꺼번에 제거하기가 사실 불가능했다. 오히려 생선 비늘이 곧추선 것처럼 때가 터실터실 일어났다. 손과 목의 때, 치아 관리 상태가 용의 검사의 주된 항목이었다. 여학생은 머리의 청결 상태와 이가 있는지가 추가됐다. 우리는 용의 검사 시작 전에 옷소매로 이빨을 문지르고 손등에는 침을 발랐다. 습기가 있는 동안은 허옇게 일어난 때가 눕기 때문에 얼핏 보면 표시가 나지 않았다. 그날은 운이 나빴다. 선생님은 두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게 해 침을 못 바르게 했다. 남학생 절반 이상이 손과 목의 때 때문에 운동장을 다섯 바퀴 돌았다. 여학생 10여 명도 머리가 불결하거나 이가 있다고 남학생과 같이 뛰었다. 운동장을 달리면서 배가 고팠다. 그래도 그날은 방과 후 즐거운 일이 있어 별로 힘들지 않았다. 문중계를 하는 친척 집에 가면 밥과 떡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논두렁 지름길로 그 과수원집에 도착했다. 늘 그렇듯이 마당 가마솥에는 소고깃국이 펄펄 끓고 있었다. 엄마는 나를 사과 궤짝에 앉히고는 커다란 그릇에 국을 퍼 담고 밥을 한 주걱 넣어 주었다. 아, 지금도 그 국밥 맛을 잊을 수 없다. 50년도 더 지난 초등학교 때 있었던 일이다. 나의 유난한 국밥 사랑은 그때 시작됐지 싶다.

국밥이란 국에 밥을 넣고 말아먹는 음식이다. 순대국밥, 콩나물국밥, 돼지국밥, 소고기국밥 등 종류가 수없이 많다. 기본 내용물은 비슷하지만, 지역마다 들어가는 재료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국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다. 하루에 많은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보부상들이 짐을 보관하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주막이나 간이식당에서 먹는 한 끼 식사였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설명이 없어도 국밥은 시간을 절약하면서 한 끼를 때우는 간편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물건을 팔면서 동시에 끼니를 때워야 하는 시골 장터, 같은 시간대에 많은 사람이 한 끼를 해결해야 하는 종친회, 야유회, 시골 운동회 등에서 국밥은 아주 편리한 메뉴였다. 국밥은 속성상 서민적일 수밖에 없다. “양반은 밥을 말아 먹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돈과 여유가 있는 사람이 왜 품위 없이 어디 쪼그리고 앉아 국밥을 먹겠는가.

정치 지도자들이 민생 행보를 할 때 재래시장이나 뒷골목 등을 찾아 길거리 음식을 자주 먹는다. 단골 메뉴는 국밥과 국수다. 서민 코스프레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기 위해서다. 선출직에 출마한 후보들도 선거 운동 기간에는 느긋하게 밥 먹을 시간이 없고, 또한 시간이 표이다 보니 보수든 진보든 진영에 상관없이 국밥이나 김밥 같은 간편식을 즐겨 먹는다. 오가는 유권자를 많이 만난다는 이점도 있다. 민생 행보나 선거운동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이해가 되고 크게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최근 국밥 먹는 장면을 두고 서로 비난하는 눈꼴사나운 모습을 보면 정말 화가 난다. 여야 후보 누구든 상시로 국밥을 먹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들 대부분은 일반 국민의 상상을 초월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다. 선거철에 유난히 서민 코스프레를 많이 하는 사람치고 정작 필요할 때 서민을 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더 역겹다. 일단 당선되기만 하면 유권자는 안중에 없다는 사실을 국민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대의민주주의란 ‘대표가 시민의 의사를 배신하는 대리 정치’라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국밥을 먹으며 나는 신뢰한다/국밥을 먹으며 나는 신뢰한다/인간의 눈빛이 스쳐간 모든 것들을/인간의 체온이 얼룩진 모든 것들을/국밥을 먹으며 나는 노래한다//오오, 국밥이여/국밥에 섞여 있는 뜨거운 희망이여/국밥 속에 뒤엉켜 춤을 추는/인간의 옛추억과 희망이여” 김준태 시인의 ‘국밥과 희망’ 1, 2연이다. 이 땅의 여야 정치인들여, 국밥 많이 드시라. 이 시도 찾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시라. 서민이 재래시장이나 난전에서 눈물을 반찬 삼아 먹는 국밥을 정치에 이용하는 당신들은 국밥뿐만 아니라 서민도 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부탁하노니, 어설프게 연출된 사진과 공허한 말장난으로 더는 국밥을 욕보이지 말라.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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