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제의 딸이 박혁거세를 낳아 신라를 다스려

▲ 경주 선도산 정상부위에 신라 초대 박혁거세를 낳은 성모를 모신 사당 성모사. 신라 안흥사지로 전해지는 곳의 마애삼존입불 바로 앞에 사당이 있다.
▲ 경주 선도산 정상부위에 신라 초대 박혁거세를 낳은 성모를 모신 사당 성모사. 신라 안흥사지로 전해지는 곳의 마애삼존입불 바로 앞에 사당이 있다.


경주 선도산 성모설화가 삼국유사 제7편에 10가지 설화와 함께 편집 소개되고 있다. 성모설화는 신라 최초의 왕 박혁거세의 어머니가 중국 황제의 딸이라 기록하고 있어 이채롭다.



삼국유사 기이편에서는 육부촌장들이 나정 우물가에 흰 말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알이 있어 쪼개 보니 단정한 사내아이가 나와 박혁거세라 이름 짓고, 그를 키워 왕으로 추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이렇게 박혁거세의 탄생을 두 가지 설화로 각각 다르게 소개하고 있다. 성모설화에서의 박혁거세 탄생에 대한 기록은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할 정도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를 기념하는 행위들은 이어지고 있다.



감통편에 등장하는 안흥사는 선도산 마애삼존입상이 있는 곳이라고 추정된다.

마애불상 앞에 성모사당이 있고 서북쪽 200m 지점에 성모유허비가 복원돼 울타리 안에 보관되고 있다. 유허비에서 앞을 바라보면 경주 시가지, 신라 서라벌땅이 훤하게 조망되고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나정과 그의 주검이 있는 오릉도 가물가물하게 보인다.





▲ 선도산 성모사당 서북쪽 200m 능선에 선도성모의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 뒤편에서 앞을 바라보면 경주 도심지 전체가 조망된다. 박혁거세 탄생지로 전해지는 나정과 그의 무덤으로 알려진 오릉도 함께 보인다.
▲ 선도산 성모사당 서북쪽 200m 능선에 선도성모의 유허비가 있다. 유허비 뒤편에서 앞을 바라보면 경주 도심지 전체가 조망된다. 박혁거세 탄생지로 전해지는 나정과 그의 무덤으로 알려진 오릉도 함께 보인다.




◆삼국유사: 선도성모가 불사를 좋아하다

진평왕 대에 지혜라는 이름의 여승이 있었는데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에 머무르며 불전을 새로이 수리하고자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꿈에 비취옥으로 머리를 장식한 예쁜 모습의 선녀가 와서 “나는 선도산 신모이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는 것이 기뻐서 금 열 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니 그대가 앉아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찾아다가 주존 부처님 세 분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53명의 부처와 6류성중 및 여러 천신과 오악의 신들을 그려라. 해마다 봄 가을에 열흘 동안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일체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푸는 것을 변하지 않는 규칙으로 삼아라”고 말했다.



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가 좌석 밑을 파서 황금 160냥을 찾아 불전 수리를 이뤘으니 이러한 공적은 모두 신모가 일러주는 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그 사적만은 아직도 남아 있지만 불법의 행사는 없어져 버렸다.



신모는 본래 중국 황실의 딸로 이름은 사소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신라에 와서 오랫동안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으니 그의 아버지인 황제가 솔개 발에 편지를 매달아 보내 말하기를 “솔개를 따라가다가 멈추는 곳에 집을 지어라”고 말했다.





▲ 선도산 동북쪽 9부 능선에 주민들이 박혁거세의 모후 성모사유허비를 조성했다. 돌담을 둘러 비를 보호하고 있다.
▲ 선도산 동북쪽 9부 능선에 주민들이 박혁거세의 모후 성모사유허비를 조성했다. 돌담을 둘러 비를 보호하고 있다.


사소가 편지를 받고 솔개를 날려보내자 이 선도산으로 날아와 멈추므로 마침내 여기에 와서 집을 짓고 지선이 됐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이라고 했다.

신모가 오랫동안 이 산에 머무르며 나라가 평안토록 도우니 신령스럽고 신이한 일들이 매우 많았다.

나라가 세워진 이래로 삼사 중의 하나로 삼았으며 등급으로는 여러 명산대천 제사의 윗자리를 차지했다.



신라 제54대 경명왕이 매를 이용한 사냥을 좋아했는데 어느 때 이 산에 올라가 매를 놓았다가 잃어버리고 신모에게 기도하여 말하기를 “만약에 매를 찾게 되면 꼭 작위를 봉해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가 날아와 책상 위에 앉으므로 신모를 대왕의 작위에 봉했다.



신모가 처음 진한에 와서 신성한 아들을 낳아 신라의 처음 임금이 됐으니 아마 혁거세와 알영의 두 성인이 태어난 근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룡, 계림, 백마 등으로 일컬으니 닭은 서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신모가 일찍이 하늘나라의 여러 선녀들에게 비단을 짜게 해서 붉은 물감을 들여 관복을 만들어 그의 남편에게 줬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신비스런 영험을 알게 됐다.





▲ 무열왕릉이 있는 선도산자락에서 성모사로 가는 길은 가파른 경사길이다.
▲ 무열왕릉이 있는 선도산자락에서 성모사로 가는 길은 가파른 경사길이다.


또 국사에서 김부식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부식이 정화 연간(1111~1117년) 어느 때에 사신의 임무를 받들어 송나라에 들어가 우신관에 갔더니 한 사당에 여자 신선의 상이 모셔져 있었다.

접대임무를 맡은 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분은 귀국의 신인데 공은 아시는지요?”라고 물었다.



이어서 “옛날에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해동의 시조가 됐습니다. 황실의 딸은 땅의 신선이 돼 선도산에 있었는데 이것이 그분의 상입니다”고 이야기했다.



또 송나라 사신 왕양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신성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제문에 어진 사람을 낳아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구절이 있었다.



‘지금 신모가 금을 시주해 부처를 받들게 하고 중생을 위하여 불법을 열어 부처의 가르침에 이르는 길을 열었으니 어찌 한갓 오래 사는 술법만 배워 몽롱한 것에만 얽매일 것이랴!’





▲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시대 안흥사 터로 전해지는 곳에 바위를 깎아 조각한 보물 제62호 선도산마애삼존입불상.
▲ 삼국유사에 나오는 신라시대 안흥사 터로 전해지는 곳에 바위를 깎아 조각한 보물 제62호 선도산마애삼존입불상.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서연산에 와 있은 지 몇십 년 되었던가/ 선녀들 불러다 신선의 옷 짜게 했네/ 오래 사는 신선술도 오묘함이 없지 않으나/ 부처님 찾아뵙고 옥황상제 됐다네.’



▲ 성모사와 선도산마애입불상이 있는 곳에서 200여m 오르면 선도산 정상 표지석이 나오고, 등산객들이 조성한 돌탑들이 곳곳에 보인다.
▲ 성모사와 선도산마애입불상이 있는 곳에서 200여m 오르면 선도산 정상 표지석이 나오고, 등산객들이 조성한 돌탑들이 곳곳에 보인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선도산 성모와 박혁거세

선도산에는 오래 전부터 산신 성모가 거처하고 있었다.

서라벌을 발 아래로 굽어보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며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 성모는 직접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을 체험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그들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보내 아름다운 세상을 꾸려보기로 했다.



성모는 진한 여섯 부락의 촌장들이 하나의 나라를 구성해 튼튼한 울타리를 형성하고, 가족들의 평온한 삶을 영위하려는 뜻을 헤아렸다.

또 육부촌장들이 회합을 가지는 날을 택해 백마가 되어 나정에 알을 낳고 기다렸다.



육부촌장들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남산 나정쪽에서 신비스럽게 휘황찬란한 빛무리가 하늘로 오르며 퍼지는 모습을 보고 모두가 달려갔다. 나정에 도착해 보니 백마가 알을 두고 길게 울더니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촌장들이 알을 깨뜨리자 훤칠하게 잘생긴 아이가 나왔다. 육부촌장들은 저마다 훌륭한 지도자를 기다려 오던 터라 하늘에서 큰 인물을 점지해준 것으로 해석하고 아이를 키워 지도자로 삼기로 했다.





▲ 선도산에서 성모사로 오르는 진입로는 처음부터 경사가 급하고 소나무숲으로 이어진다.
▲ 선도산에서 성모사로 오르는 진입로는 처음부터 경사가 급하고 소나무숲으로 이어진다.


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서 벌써 어른의 신체로 늠름하게 성장했다.

머리도 뛰어나게 총명했다.

어른들이 10년 이상 공부해야 할 내용들을 다섯 살이 된 이후 1년에 모두 이해할 정도로 뛰어났다. 이는 성모가 현몽을 통해 아이가 잠들었을 때 지혜를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이다.



육부촌장은 아이를 박혁거세라고 이름 지었다.

혁거세는 일곱 살이 되면서 육부촌을 돌면서 촌마다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무술과 비학을 익혔다.

육부촌이 지역적인 특성을 감안해 부락별로 비축한 창술, 궁술, 도법과 검법, 약제술, 기문둔갑술, 전쟁의 전술과 전략을 집대성한 비법까지 모두 익혔다.



성모는 혁거세가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적극 나서서 도왔다.

약제 공부를 할 때는 산삼과 기이한 약초를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체력을 키우는 훈련을 할 때는 신비스런 힘을 가진 영물을 먹을 수 있게 하는 등의 기연을 만들어 줬다.



혁거세가 여섯 부락을 순회하면서 무술과 학문을 익혀 13세가 됐을 때는 칠척 장신에 근엄한 모습의 지혜로운 장군이 돼 있었다.

그의 무술 실력은 육부촌에서 솜씨가 뛰어나기로 소문이 난 열 명의 장정이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그의 옷자락 하나 찢을 수 없을 정도로 신출귀몰한 대장군이었다.





▲ 신라 초대 박혁거세왕이 탄생한 곳으로 전해지는 서남산자락의 나정.
▲ 신라 초대 박혁거세왕이 탄생한 곳으로 전해지는 서남산자락의 나정.


그의 지혜 또한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다.

마을마다 논쟁이 되는 일들은 혁거세가 논리적인 해석으로 서로 이해하게 하며 깔끔하게 오해를 풀어주는 등으로 육부촌에서는 이미 척척박사로 떠받들었다.



성모는 혁거세의 일을 거들어 줄 현명한 여인을 알영정 계룡에게서 태어나게 해 부부의 연을 맺게 했다.



혁거세는 뛰어난 자질에다 덕을 쌓아 신라 왕이 되고부터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선정을 베풀었다.



혁거세는 신라 왕위에 오른 이듬해 꿈을 통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경위를 이해하고, 모후가 선도산의 성모라는 것을 알았다.



혁거세는 선도산에 사당을 지어 매월 초하루에 직접 제를 올리며 모후의 덕에 감사를 드렸다. 성모사에 제를 올리는 일은 혁거세가 죽은 이후에도 신라 궁중에서 행하는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로 빠지지 않고 이행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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