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대우

흔히들 중앙은행을 가리켜 인플레 파이터(inflation fighter)라는 표현을 쓴다. 이는 금융 안정을 제외하면 중앙은행이 실업률과 물가 수준의 안정이라는 2가지 중요한 책무를 수행하기 때문인데, 1979~1987년까지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의장 직을 수행했던 폴 볼커(Paul Adolph Volcker)가 대표적인 인플레 파이터로 유명하다.

볼커 전 의장이 인프레 파이터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간단히 말하자면 급격한 금리 인상을 통해 치솟는 물가를 잡았기 때문이다. 당시 세계 경제는 물론이고 미국 경제도 오일쇼크로 경기 침체에도 불구하고 물가가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이에 맞서 그는 급격한 금리 인상을 통해 10% 이상 치솟던 물가 수준을 3%대 초반으로 안정시킴으로써 1990년대 미국 경기 호황을 이끈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저금리로 겨우 연명하던 좀비기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기업 도산을 유발했고, 빚더미에 앉은 농민들이 과격한 시위에 나서는 등 시장의 극심한 반발과 단기적인 고용 악화 등과 같은 부작용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최근 들어 인플레 파이터란 말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코로나19 위기로부터 세계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면서 우려할 정도는 아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물가 상승 압력이 높아지고, 국채금리 또한 급등락하면서 금융시장 변동성이 커지고 있어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물가 안정이라는 명목 하에 중앙은행이 본격적인 금리 인상에 나서면서 금융시장의 혼란은 물론 좀비기업들의 무차별적인 퇴출, 단기 실업률 상승, 단기 경기 후퇴와 같은 부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아닌 지에 대한 시장 우려들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인플레 파이터의 역사를 잘 아는 제롬 파월(Jerome Powell) 현 FRB 의장은 미국 경제가 빠르게 회복 중이지만 물가가 목표치인 2%를 넘더라도 큰 틀에서 목표치에 수렴하면 금리를 인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방침을 밝힌 바 있다. 즉, 현 시점에서 보면 중기적으로는 중앙은행의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정책 목표가 완전 고용에 있기 때문에 인플레 파이터가 아닌 일자리 투사의 모습을 유지할 것임을 내비친 것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보면 이는 한창 파티 중인 금융시장에는 더 할 나위 없는 호재일 뿐 아니라 통화정책당국의 정책 리스크도 덜어주는 것으로 실물경제에 부담을 주는 불확실성 해소에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최근 들어 물가 상승 속도가 빨라지면서 물가안정목표인 2%대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미국 저금리 상황이 당분간 이어진다면 우리 통화정책당국도 금리 인상 시기를 조정하면서 금융시장과 실물경제에 부담을 덜어줄 수 있게 된다. 더욱이 이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는 국내 고용 시장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물론, 미국 경제의 회복세가 유지되면서 세계 경제가 활황 국면에 본격 진입하게 되면 수출 부문을 중심으로 경기 반등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고용과 내수 전반에 활력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혀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일자리 투사로서의 통화정책당국의 역할이 유지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과열 우려가 큰 금융 및 자산시장의 불안정성을 키울 여지가 다분히 있다는 것을 내포한다. 가뜩이나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통화정책당국의 역할이 전환되는 충격은 상상 밖으로 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저금리나 공공부문으로부터의 지원 등으로 증가한 좀비기업 등은 중장기적으로는 모처럼 회복 기조를 맞은 우리 경제와 고용에 부담을 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파월 의장이 밝힌 바와 같이 미국 중앙은행이 앞으로 수년간 일자리 투사로서의 역할에 충실해 줬으면 좋겠지만, 과거 경험에서 보듯 언제 입장이 바뀔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 통화정책당국의 역할도 바뀔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언제까지 우리 통화정책당국이 일자리 투사로서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조만간 우리 앞에 인플레 파이터로 변신할 수도 있으니 안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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