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운석
▲ 박운석
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크레파스와 수채물감의 특정색을 살색으로 이름 붙인 것은 헌법 제11조의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으므로 기술표준원에 한국산업규격(KS)을 개정하도록 권고한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02년 7월 크레파스 색상의 피부색 차별에 관해 권고한 결정례의 주문 내용이다. 이후 기술표준원은 살색을 연주황으로 개정 고시했고, 한자표기인 연주황은 그 뜻을 쉽게 알 수 없어 어린이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이자 인권침해라는 지적에 2005년 ‘살구색’으로 최종 변경했다.

이후 16년이 지났다. 하지만 색깔과 관련된 인종주의적 편견은 여전하다.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언론에서조차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검은 대륙의 코로나, 더 암울하다’ 지난해 12월 어느 일간지의 제목이다. “검은 대륙의 코로나…. 속수무책” 올해 1월 한 공중파 방송사의 뉴스다.

제목만 보면 자칫 20년 전 뉴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최근에도, 아직까지도 여전히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부르는 언론과 마주한다. 생각해보자. 검은 대륙과 반대되는 하얀 대륙은 쓰지 않는다. 마치 ‘검둥이’라는 말은 쓰면서도 사람을 향해 ‘흰둥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처럼.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저, 창비)를 쓴 저자의 말을 빌리면 차별의 표현을 담은 이런 말을 쓰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당신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수 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스스로가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양인과 결혼하면 글로벌 가족이고 동양인과 결혼하면 다문화 가족이라고 표현한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다문화라는 말 자체가 이미 차별의 용어가 돼 버린 것이다.

요즘 미국에서는 아시아계를 향한 혐오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피해자 대부분이 여성과 노인인데다 욕설부터 협박과 폭행까지 이어지고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 #StopAsianHate(아시아계에 대한 혐오를 멈춰라)라는 해시태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방탄소년단도 ‘인종차별’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얼마 전에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는 손흥민 선수도 인종차별의 표적이 됐다. 최근에는 미국 올림픽 가라테종목 국가대표인 일본계 미국인이 혐오범죄의 표적이 됐고 그전에는 10대 한국계 여성이 ‘매춘부’라는 욕설을 듣고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에 있는 증오 극단주의 연구센터 발표 자료가 심각성을 반증해준다. 센터는 반 아시아계 미국인 증오범죄가 2020년에 전년도에 비해 약 149%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미국 내에서 주로 흑인과 백인, 또는 히스패닉에 대한 증오범죄 등 전체 혐오 범죄율은 6%가 감소한 것에 비하면 놀랄만한 수치다. 미국 사회에 코로나 바이러스와 아시아 차별 바이러스 등 두 개의 바이러스가 번지고 있다고 할 만하다.

하긴 미국만의 문제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면도 있다. 서울시가 지난달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코로나19 진단검사를 강제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하자 경기, 전남, 전북 등 일부 광역단체도 서울시를 따라 했다. 외국인 노동자는 의무적으로 검사를 받아야 하며, 아니면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냉정하게 따져보면 행정기관의 힘으로 차별을 명령한 것이다. 아시아인들이 미국 등지에서 혐오발언을 듣는 것과 뭐가 다른가.

혐오는, 또 차별은(의도하든 아니든) 전염이 빠르다고 했다. 서로를 부추기는 기운이 넘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잔인해지고 죄책감도 사라져간다. 그러다보면 혐오 또는 차별이 어느새 폭력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지난 3월 말 일본의 한 편의점 업체가 여성용 속옷의 색깔을 살색이라고 표기했다가 차별적이라는 지적을 받고 제품을 회수했다. 그러자 왜 살색 표기가 문제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일본의 누리꾼들이 많았다. 이처럼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심각한 혐오주의자나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평범한 우리 모두가 선량한 차별주의자일 수 있다.

선량을 가장한 이 같은 차별을 하나하나 찾아내고 꾸준히 시정해나가는 게 중요하다. 물론 언론이 먼저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벗어날 일이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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