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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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철환

객원논설위원

미나리의 윤여정이 우리나라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감독상, 작품상, 외국어영화상, 각본상 등 4개 부문에서 아카데미상을 받았지만 연기부문은 아예 노미네이트되지도 못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토종 배우 윤여정의 연기상 수상은 아쉽고 찜찜했던 마음을 시원하게 뚫어줬다. 장기간 지속된 코로나로 인해 심신이 지친 가운데 날아든 낭보라 더욱 반갑다.

유교적 엄숙주의와 점잖은 예법 하에서 감정을 감추는 관행에 익숙한 연기자가 개방적인 유목사회의 연기자보다 그 경쟁력이 떨어지는 건 불문가지다. 서슴없이 자기주장을 하고 다이내믹한 제스처와 파워풀한 표정이 일상인 미국의 배우를 우리 배우가 제키고 앞서가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유교권 동양3국의 사정도 대동소이하다. 이연걸이나 성룡의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동서양에 가로놓인 신체적 문화적 장벽을 실감한다. 압도적인 몸집과 역동적인 표정에 위축되는데다 영어까지 어눌하다보니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윤여정의 연기상은 더욱 값지다.

윤여정은 수상 소감에서 자신은 운이 좋아서 과분한 상을 받은 것처럼 말했다. 겸양의 말씀이다. 올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된 배우의 면면을 보면 모두 주연 급이다. ‘힐빌리의 노래’의 글렌 클로스, ‘보랏 속편’의 마리아 바칼로바, ‘더 파더’의 올리비아 콜맨, ‘맹크’의 어맨다 사이프리드 등 쟁쟁한 연기자가 버티고 있었다. ‘골든 글로브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세계 최정상급 배우 글렌 클로스에서부터 한창 핫한 스타 어맨다 사이프리드까지, 윤여정은 그들과 당당히 겨뤄 승리한 것이다. 가히 인간승리의 전범이라 할 수 있다.

사회적 환경적 악조건 속에서 글로벌 스타들과 겨뤄 아카데미 연기상을 거머쥔 윤여정 배우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신체적 문화적 장애를 짊어진 채 이혼과 자녀 양육 등 개인적 불행까지 안고 74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세계적 연기자로 우뚝 선 모습은 감동적이다 못해 경이롭기까지 하다. 흔히 ‘인생은 육십부터’라면서 ‘인생 이모작’을 이야기한다.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말은 오히려 ‘인생은 육십까지’라는 역설로 귓전을 울릴 뿐이다. 하지만 윤여정은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줬다.

윤여정의 쾌거는 거저 주어진 건 결코 아니다. 혹독한 고난에 굴하지 않고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이겨낸 결실이다. 그녀는 생계형 연기자였다. 쌀독에 쌀이 떨어질 때가 더 많았던 적도 있고, 두 아들을 키우기 위해 최저시급 2.75달러를 받고 슈퍼마켓에서 계산원으로 일한 적도 있다. 돈을 벌기 위해 단역이나 보조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살기 위해 목숨 걸고 연기했다는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기적을 만든 원천은 절박함이다.

부모나 배우자가 돈이 많아 비빌 언덕이 있으면 악착같은 근성이 사라진다. 독기가 빠지고 늘어지게 마련이다. 천천히 놀면서 대충대충 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하기 싫어서 억지로 하는 게을러터진 사람이 무엇인들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배우가 편하면 떨림이 없는 연기가 나오고, 그런 죽은 연기는 보는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한다. 제대로 된 연기, 감동을 주는 연기를 하려면 절박해야 한다. 절박한 사정을 통제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연기를 보여준 윤여정은 스타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박경리 소설가도 고난을 당해 굴복하지 않고 성공을 일궈낸 위인으로 평가된다. 남편을 사별하고 혼자된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생활의 방편으로 소설을 선택했다. 살아남기 위해 죽도록 글을 썼고, 어린 딸을 지켜내기 위해 처절하게 원고지를 메웠다. 불후의 대하소설 토지는 절박함과 작가정신이 만나 일궈낸 아름다운 진주다. 불행이란 도전을 피와 땀으로 녹여내 응전함으로써 진주 같은 문학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다.

좋은 환경에서 자란 열매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여문 열매가 훨씬 달고 맛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과관계는 고통과 인내를 요하는 문화예술 부문에 뚜렷이 나타난다. 비록 무척 힘들겠지만 죽을 각오로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성취를 이루고 고지에 도달하는 법이다. 앞으로 윤여정을 롤 모델로 삼아 성공하는 사람이 많아지길 기대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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