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익 대구문화재단 대표
▲ 이승익 대구문화재단 대표
이승익

대구문화재단 대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유족들이 대규모 사회기부 계획을 밝혔다. 감염병 퇴치와 어린이 난치병 치료비 등으로 1조 원을 내놓기로 한 것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을 국민 품에 내놓기로 했다는 점이다. 이 회장이 평생 모은 국내외 명작 2만 3천여 점을 조건 없이 기증한 것 못지않게, 법인출연 같은 우회 수단이 아닌 직접기증 방식을 택한 것도 일반의 예상을 뛰어 넘었다. 기증 작품 가운데는 모네와 고갱, 피카소부터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에 이르기까지 국내외 작가들의 걸작과 청자, 백자 등 값으로 매기기 어려운 명작이 두루 포함돼 있다. 굳이 따진다면 시가 감정 총액이 2조~3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하니 절로 입이 벌어진다.

이 덕분에 대구미술 선구자 여덟 작가, 21점이 대구로 온다니 지역 문화예술계로서도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많은 작품이 대구미술관에 기증되기를 바라던 시민들 입장에선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이인성, 이쾌대, 서진달 등 지역 작가들의 수작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구미술관은 지역작가 컬렉션을 보다 충실히 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동시에 관련 학계에서도 지역 미술사 연구에 각별한 의미를 두고 이 작품들이 대구로 올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일부에서는 이를 달리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오히려 이 회장이 남다른 안목으로 국내외 명작들을 수집해 기증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구현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모델로 봐야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나아가 이번 기부는 다른 많은 기업인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우리사회에 문화기부 운동에 눈을 돌리게 하는 등 긍정적인 후방효과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일제 강점기 간송 전형필 선생이 사재를 털어서 국보급 문화재와 예술작품을 지켜냄으로써 우리 자긍심을 높였듯이, 이번 사례 또한 세계수준의 문화예술 작품은 소장자 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자산이라는 인식을 확산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대구예술발전소에 문을 연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에 기증된 각종 자료 수집과정도 이런 추론을 뒷받침하기 충분하다. 수집작품 가운데는 1950~1960년대 대구 예술가들이 파블로 카잘스, 레너드 번스타인 등 해외 유명 예술인들과 교류한 전보와 편지 등 귀한 자료가 1천여 점이나 된다. 6·25 전쟁 포화 속에서도 예술의 꽃을 피우던 대구 소식을 전한 미국 음악잡지 ‘에튀드’ 기사 원본도 전시돼 있다. 이경희, 이필동 선생 같은 작고 예술인 유족과 원로 예술인들이 오랫동안 보관해 오던 자료도 부지기수다. 이사를 하거나 유품 정리 과정에서 버렸을 법한 각종 자료를 고이 보관해 오다가 아카이브 조성 취지에 공감해 조건 없이 내어 놓은 소장자들의 문화예술 사랑의 결과물이다.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열린 수장고’ 개관식에서 만난 지역 오페라운동 선구자 고 이점희 선생 유족은 “선친이 그토록 아끼던 자료를 시민들에게 내어 놓을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 그렇지만 어른이 남기신 자료 가운데 일부는 어쩔 수 없이 폐기한 게 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시민들 입장에서는 귀중한 자료를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오다 기증한 것만 해도 고마운데, 그는 정작 문화예술 자료는 공공자산인데 모두 고스란히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 스스로를 낮췄다. 고 이건희 회장과는 다른 또 하나의 사회적 책임 실천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을 계기로 문화재와 미술품을 상속세로 낼 수 있는 물납제 도입 논의도 급물살을 탈 것이라는 얘기가 들려온다. 제도적 뒷받침이 이뤄진다면 더 많은 소장자들이 이 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대열에 합류할 것이다.

문화예술이 곧 국가와 도시 경쟁력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이건희 컬렉션’ 사회 환원 발표에 이어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조성에 힘을 보탠 향토 예술인과 그 가족들의 훈훈한 소식이 시민들의 예술사랑과 문화기부 확대로 이어져 문화예술도시 대구의 경쟁력을 더욱 높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