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도산서원 농운정사



한국인이라면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이나 그곳에 배향된 ‘동방의 주자’라고 칭송되는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 퇴계 이황(1501~1570)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터이다. 설령 잘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현재 사용되고 있는 1천 원짜리 지폐 앞면의 인물이 퇴계 이황이고, 뒷면에 실린 산수화가 퇴계 생존 시에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을 묘사한 조선 후기 화가 정선(1676~1758)의 ‘계상정거도’라는 그림(물론 이 그림을 둘러싸고는 정선의 진작(眞作) 여부, 묘사한 장소 등에 대한 논란은 있다)이라는 사실을 알면 오히려 친근감까지 느끼게 될지도 모르겠다.

조선 후기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퇴계 이황과 도산서원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끼쳐왔던 영향력은 너무나 커서, 짧은 지면에 그것을 일일이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흔히 안동을 중국의 공자와 맹자의 출신지에 빗대어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하거나, 안동시가 스스로를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부하는 배경에는 바로 도산서원을 중심 거점으로 둔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퇴계학파 혹은 영남학파로 통칭되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존재가 뒷받침되고 있음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도산서원은 일찍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170호로 지정됐고, 2019년에는 소수서원・도동서원 등 나머지 8개 서원과 함께 ‘한국의 서원’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도산서원은 바야흐로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 세계인들까지 방문해 보고 싶어 하는 문화유산이자 관광 명소로까지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구별되는 도산서원의 두개의 공간

도산서원은 흔히 전체를 하나의 문화유산으로 묶어서 이해되곤 한다. 그러나 이미 서원의 주요 구성 건축물과 공간들이 별개의 국가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는데서 입증되듯이 구성 부분마다 기능도 다르고 각각에는 나름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예컨대 보물 제210호인 전교당은 도산서원의 강당으로 서원 유생들에게 교육이 이루어지는 강학의 장소였고, 보물 제211호인 상덕사와 그 출입문인 삼문(三門)은 퇴계와 그의 고제 월천 조목의 위패를 봉안한 제향 공간이다.

또 보물 제2105호인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생존해 계실 때 그곳에 기거하며 친히 제자・문생들을 지도했던 교실과 같은 장소였으며, 보물 제2106호인 농운정사는 도산서당에서 수학하는 선비들이 숙식하던 일종의 기숙사 역할을 했던 건물이었다.

이렇게 서원 경내 건축물들의 기능이나 창건 시기 등을 고려하면, 도산서원은 서로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서원 경내의 앞쪽에 자리잡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뒤쪽의 상현사와 삼문, 전교당, 동재인 박약재와 서재인 홍의재 서고(書庫)인 광명실 등으로 구성된 서원 구역이다.

전자가 퇴계가 살아있을 적에 친히 제자・문생들을 훈도했던 교습의 터전이었다면, 후자는 그가 서세한 후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사당을 세워 향사를 올리는 한편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학문 전수를 통해 학맥을 이어나가게 한 교육의 장이었다. 다시 말하면 경내 앞쪽의 서당 구역은 퇴계 생전의 활동 공간, 뒤쪽은 그의 사후 향사와 후진 교육이 이루어졌던 추모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창건 이야기와 정사 살펴보기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책을 펴낸 후, 문화유산 탐방에서 중요한 하나의 지침처럼 여러 사람의 입에 회자된 경구가 하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문화유산에 흥미를 가지고 탐방를 해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답사가 끝난 다음, 이 말의 숨은 의미를 절감하게 된다. 그냥 예사롭게 보아 넘기며 스쳐 지나온 작은 건물, 초라한 돌담, 읽기조차 힘든 현판 하나에까지 역사적・문화적 향취가 남아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기 때문이다.

도산서원 탐방에서도 이 말은 예외 없이 적용될 수 있는 불변의 교훈이라 할만하다. 곧 도산서원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원 자체를 하나의 큰 덩어리로만 볼 게 아니라 서원 경내의 건축물과 공간을 구별하여 부분적으로 살펴보는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각각의 부분들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어 그것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또 그러했을 때에 아는 만큼 보이게 되며 결국 도산서원 전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이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은 생존 시의 공간, 도산서당과 농운정사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도산서당 시절부터 식수로 사용한 우물인 열정(洌井)을 오른 쪽으로 두고, 몇 층의 계단을 올라 서원의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마주치는 것이 퇴계 생존 시의 공간인 도산서당 구역이다. 왼쪽으로 농운정사, 오른쪽 조금 위에 도산서당이 각각 남향으로 엇비스듬히 서 있다. 스승과 제자가 하나의 영역 안에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거처하며, 학문을 전수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퇴계선생의 ‘도산기(陶山記)’ ‘퇴계선생문집 권3, ‘도산잡영(陶山雜詠)병기(幷記)’와 제자인 성재 금난수(1530~1604)가 지은 ‘도산서당영건기사’ (성재문집 권3)에서 그 대강을 알 수 있는데, 두 자료를 종합하여 전후 사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퇴계는 진사・사마시를 거쳐 1534년(중종29)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으나, 항상 향리로 돌아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려는 뜻이 강하였다. 기회를 엿보던 퇴계는 1551년(명종6)에 풍기군수를 사임하고부터는 향리에 머물며 더욱 성리학에 침잠하였다.

이때부터 자연히 퇴계에게는 성리학 탐구와 사색 그리고 제자 교육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필요해졌다. 세 차례에 걸쳐 서당을 세웠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은 바 있던 퇴계는 57세가 되던 1557년(명종12)에 도산 남쪽 기슭에 새로 서당 지을 땅을 정하고, 설계도면까지 작성하였다.

2년후부터 본격적으로 건축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를 맡았던 예안 용수사의 승려 법련이 공사 시작 얼마 후 사망하여 승려 정일이 이어받아 퇴계가 60세가 되던 1560년에 일차로 서당 건물을 완공하였고, 이듬해 1561년(명종16)에는 정사 건축까지 마쳐 서당 관련 건축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서당 건물은 남향의 3칸 기와집으로 서쪽 1칸은 골방이 딸린 부엌이고, 가운데 1칸은 퇴계가 거처하던 온돌방이었으며, 동쪽 1칸은 대청으로 문생들이 앉아 공부를 배우는 공간이었다. 퇴계는 이 건물 전체를 도산서당으로 명명하고, 거처하는 온돌방에는 완락재, 동쪽의 대청에는 암서헌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지금 도산서당의 교학 공간인 암서헌의 규모를 보면 아무리 많게 잡아도 10명 남짓의 문생들이 앉아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 보인다.

한편 제자・문생들이 머무는 정사는 도토마리형(工字形)의 특이한 형태의 8칸 건물인데, 건물 전체를 농운정사라 칭하고 서쪽의 마루에 관란헌, 동쪽 마루에 시습재, 가운데 온돌방 2칸에는 지숙료라는 편액을 걸었다. 각 부분의 기능을 고려한 작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는 퇴계의 성리학적 자연관에 기초하여 건축된 소박한 형태의 학사 건물로 조선 선비들의 절제와 검약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된다.

농운정사는 ‘언덕 위의 구름’이라는 얼핏 낭만적인 이름의 민도리 맞배지붕 건물인데, 특이하게도 도토마리형(工字形)의 평면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工’자의 가운데 ‘一’자에 해당하는 부분은 4칸 통칸의 온돌방으로서 지숙료라는 이름을 가졌다. 유생들의 침실 기능을 했던 공간이다. 도산서당이 비스듬히 올려다 보이는 동쪽의 마루 1칸은 시습재로서 아마 정사에 머무는 유생들의 자습 공간일 것이다.

서쪽의 마루 1칸은 관란헌이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자금은 안동호로 변한 당시의 낙천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던 공간일 것이다. 오늘날의 눈으로는 어느 곳이나 협소하기 짝이 없어 얼마나 많은 유생들이 생활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이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통하여 퇴계로부터 친히 학문을 전수받아 그 학맥을 잇는 기라성같은 학자와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다만 퇴계의 문인들을 집성한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이라는 책이 있지만, 퇴계가 이곳에서 손수 가르치고 키워낸 학자와 선비들의 정확한 숫자나 명단이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운정사를 거쳐간 퇴계의 직전(直傳) 제자들은 퇴계학파의 구심점이 되어 당시 사회를 이끌어 나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농운정사의 좁은 마당을 거닐면, 500년 전 이곳에 모여 젊음과 열정을 불태우며 오로지 학문 탐구에 몰두했던 옛 선비들의 숨결이 어디에선가 묻어 나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문기

경북대학교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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