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푸드의 대명사, 단팥죽의 맛에 빠져보세요||한국화 채색화가가 만드는 단팥죽의 맛은 어떨

▲ 이경미 대표가 단팥죽 파우치를 들어 보이고 있다.
▲ 이경미 대표가 단팥죽 파우치를 들어 보이고 있다.
어느 중견화가가 있었다. 꽃과 사람, 동물을 소재로 작품 활동을 했었다. 작품의 주제는 언제나 사랑이었다. 말썽꾸러기 피노키오가 온갖 모험을 하다가 고래 뱃속으로 들어갔을 때 할아버지 제페토가 끝까지 쫓아가서 구해내는 ‘피노키오의 모험’을 그림으로 그린 것도 할아버지의 헌신과 사랑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화 속에 흐르는 사랑의 힘을 아이들에게 쉽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화가의 손에는 붓이 아니라 주걱이 있다.

형형색색의 물감을 배합하는 것이 아니라 붉은색 팥을 씻고 삶는다. 이 화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화가는 영남알프스로 불리는 운문산 인근 해발 400m 산간마을에서 수제 단팥죽과 팥빙수용 통단팥을 만든다.

그동안 그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했다면 이제는 먹거리로 사람들의 건강을 돕는다.

그렇다고 화가의 길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단팥죽을 만들면서도 틈을 내어 작품활동을 한다.

청도군에서 ‘열매선’을 운영하는 이경미(44) 대표 이야기다. 이 대표가 만드는 단팥죽과 통단팥은 ‘안녕 콩죽팥죽’이라는 브랜드로 판매된다.

▲ 이경미 대표가 1차로 삶은 팥을 2차 삶기를 위해 증숙기에 투입하고 있다.
▲ 이경미 대표가 1차로 삶은 팥을 2차 삶기를 위해 증숙기에 투입하고 있다.
◆예술이 흐르는 팥빙수 가게

이 대표는 한국화중 채색화를 전공한 경력 24년의 화가다. 지금까지 여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고 단체전에는 100여 회나 참여했다.

사랑을 주제로 사람과 동물, 꽃을 주로 그렸다. 동화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도 그 속에 스며든 사랑을 불러내어 동심에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식품가공과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화가는 어쩌다가 식품가공에 뛰어든 것일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 앞에 조그마한 팥빙수 가게를 열었었다. 아이들의 간식비라도 벌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마침 여름이었고 만들기도 쉬워보였다.

가게는 빌렸으나 인테리어 비용이 모자랐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남편과 함께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자신의 그림을 걸었다.

빈 벽면에는 그림도 그렸다.

팥을 삶고, 얼린 우유를 갈아 팥빙수를 만들었다. 하굣길의 학생들이 고객이었다. 맛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학부모들의 발길로 이어졌다.

팥빙수를 맛보러 오기도 했지만, 일부는 불량식품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이기도 했다.

만드는 과정을 지켜본 학부모들은 금세 안심했고 이들은 단골이 됐다. 대박행진이 시작됐다.

팥빙수의 맛과 그림이 어우러진 예술이 흐르는 팥빙수 가게라는 입소문이 퍼져나갔다. 그림을 사겠다는 고객도 나타났다.

전시 기회를 얻기 힘든 동료들의 작품도 전시했다. 소액이지만 그림 판매 수수료는 소아암환자 돕기 성금으로 기부했다. 가게가 인기를 끈 것은 막과 그림, 나눔이 합쳐진 시너지 효과였다.

작은 욕심이 생겼다. 좀 더 맛있는 단팥죽을 많이 만들어 더 많은 사람에게 맛보이고 싶었다.

▲ 세척작업을 마친 국산 팥.
▲ 세척작업을 마친 국산 팥.
◆국산 팥을 구하러 친정마을로 귀농

2019년 2월에 부산의 팥빙수 가게를 접고 친정인 청도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았다. 깊은 산골마을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부산의 높은 임대료 등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청도에는 농사를 짓는 아버지와 건축업을 하시는 삼촌이 있었기에 든든한 어깨에 기대고 싶은 마음도 있단다.

더 큰 이유는 팥이었다.

믿고 사용할 수 있는 국산 팥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팥 농사를 짓는 농민들을 소개했다.

농산물은 토질과 환경에 따라 맛과 영양이 달라진다. 팥도 마찬가지다.

청도는 운문산(1천195m)을 중심으로 영남 알프스로 불리는 높은 산들이 이어져 있다.

골이 깊고 산이 높아 사계절이 뚜렷하고 일교차가 큰 지역이다.

따라서 청도지역의 팥은 단맛이 나고 깔끔한 맛이 나 디저트용으로 적합하다는 평을 듣는다.

지역 농가와 계약재배를 통해 팥을 공급 받는다.

재배의 모든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원료에 대한 신뢰성이 확보된다는 의미다.

친정 마을이지만 초기 정착이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다.

대형차량의 통행이 어려운 산골이어서 건축 과정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좁고 굽은 산길이라 택배차량도 들어오지 않아 직접 제품을 싣고 면소재지까지 나와서 배송하는 번거로움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 세척작업을 마친 국산 팥.
▲ 세척작업을 마친 국산 팥.
◆내 가족이 먹는 단팥죽

“좋은 재료로 바르게 만들고, 가정에서 만든 것과 같은 맛을 내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단팥죽이나 통단팥은 대표적인 슬로우 푸드다.

가공 과정이 지루할 정도로 길다. 그래서 끈기가 필요하다.

팥은 철저한 선별 과정을 거친다.

탈곡 과정에 혼입된 이물질과 미성숙한 팥은 완전히 골라낸다. 선별을 마치면 3~6회에 걸쳐 세척을 한다.

세척 과정에서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던 벌레가 먹은 팥들은 물에 떠오른다. 이것까지 걷어내면 최상품의 팥만 남는다. 1차로 20분 정도 삶은 후에 팥물은 버린다. 2차 삶기에서는 정수 과정을 거친 정제수를 넣고 10시간 정도 삶는다.

압력솥을 이용하면 1~2시간 만에 마칠 수 있지만 상압(감압도 가압도 하지 않은 일정한 압력)에서 장시간 삶는 어려움을 감수한다.

긴 시간 동안 삶으면 으깨지 않아도 뭉글뭉글한 상태가 된다.

가마솥에서 긴 시간 동안 곰탕을 끓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채로 거르지 않지만 입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에 설탕과 전분, 정제염, 통계피를 넣고 한 번 더 끓이면 단팥죽이 완성된다.

통단팥은 팥빙수를 만들 때 토핑용으로 쓰인다. 가공에 긴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주 2회만 생산한다.

“콩죽팥죽의 맛의 비결은 국산 팥과 정성”이라고 이 대표는 자신 있게 말한다.

▲ 증숙기에서 2차 삶기 작업 중인 국산 팥.
▲ 증숙기에서 2차 삶기 작업 중인 국산 팥.
◆연구 또 연구로 개발한 팥물과 감자스프

빠르게 변화하는 소비자들의 욕구에 맞추기 위한 신제품 개발에 대한 이 대표의 열정은 남다르다.

소비자 욕구에 맞추면서 단팥죽과 통단팥이 가진 계절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최근에 팥물과 감자스프를 개발하고 출시를 앞두고 있다.

팥물은 팥에 함유된 단백질과 비타민, 무기질, 사포닌 성분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식이섬유와 올리고당이 많아 장 속에 유산균을 증식시켜 변비와 소화불량에 도움을 주고 GI지수(혈당지수)가 낮아 다이어트에도 좋다는 점에 착안했다.

가공 과정은 간단하지만 효과는 좋다. 깨끗이 세척한 팥을 30분 간 끓는 물에 삶은 후 그 물은 버리고 다시 2차로 1시간 정도 삶고 여과 과정을 거친다.

오직 팥과 정제수만을 사용한다. 아무런 첨가물도 넣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팥물 그 자체다.

와인처럼 붉은 색을 띄면서 반투명한 상태다. 130g용 파우치에 넣어서 판매한다. 감자스프는 아침 간편식과 영양간식으로 만든 제품이다.

양파와 대파, 버터, 우유에 올리브오일과 천일염을 넣고 80% 정도가 익을 때까지 볶은 후 삶은 감차를 으깨어 넣고 삶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걸쭉한 죽 상태가 되면 파우치에 넣어 냉동 상태로 유통시킨다.

파우치에 넣었기 때문에 그대로 빨아서 먹을 수 있고,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먹을 수도 있다.

팥물과 감자스프는 개발을 마치고 내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 이경미 대표가 2018년 부산 ‘타워아트갤러리’에서 열었던 개인전인 ‘시간여행’의 대표 작품인 ‘영원-시작과 끝’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 이경미 대표가 2018년 부산 ‘타워아트갤러리’에서 열었던 개인전인 ‘시간여행’의 대표 작품인 ‘영원-시작과 끝’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다.
◆예술과 나눔문화 실천

현재는 단팥죽과 통단팥 만을 생산·판매하고 있지만 앞으로 제품의 다양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다양한 종류의 간편식을 찾는 소비자의 요구에 맞추고 연중 소득을 올리는 경영시스템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미 개발을 완료하고 출시를 준비 중인 팥물과 감자스프에 이어 두유와 호박죽을 개발할 계획이다. 대부분 간편식 중심이다.

제품의 다양화를 추진하더라도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식품 가공을 하면서도 작품 활동도 병행할 계획이다.

“그 동안은 제 작품의 배경이 도시생활이었다면, 이제는 청정한 자연과 순박한 농민들의 마음이 담긴 농촌생활의 모습을 작품에 담아보는 욕심을 가져본다”며 “기회가 되면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싶다”는 계획을 전했다.

또 식품 가공을 통해 생기는 수익금의 일부를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기부활동도 계속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글·사진: 홍상철 대구일보 객원편집위원(경북도농업기술원 강소농민간전문위원)



이동률 leedr@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