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서애 류성룡의 삶과 정신

발행일 2021-10-05 1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옥연정사는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회고록인 ‘징비록’을 구상하고 저술한 곳이다. 류성룡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탄홍스님의 도움을 받아 지은 것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이다. 김진홍 기자.
서애 류성룡은 20대 시절 퇴계 이황으로 부터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스물 다섯에 벼슬길에 오른 그는 신진사류의 기수로 요직을 두루 거치며 40대 후반에 재상의 반열에 오른다.

임진왜란 때는 출중한 국제감각과 전략으로 나라의 군사업무를 총괄하며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조정에서 물러난 뒤 자신의 뿌리 마을에 낙향해 저술활동과 후학양성에 심혈을 쏟으며 병산학맥을 일으켰다.

서애의 흔적이 남아있는 하회마을 충효당과 병산서원, 옥연정사에 들어서면 그의 학문, 융통성, 합리성, 열린사고 등을 접할 수 있다.

서애는 “노비라도 적의 머리 셋만 가져오면 벼슬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시 문벌위주 유학자들의 관념론을 비판했고, 공정사회의 중요성과 실용을 중시한 위대한 경세가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 선생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난세의 영웅이 된 서애의 삶

서애는 중종37년(1542) 경북 의성 사촌마을 외가에서 태어났다. 서애의 선조들은 안동 풍산현에서 살다가 6대조 때 연꽃이 물 위에 떠있는 형국의 영남 3대 길지로 손꼽히는 현재의 하회마을로 터전을 옮겼다.

그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부친 류중영과 모친 안동 김씨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여덟 살에 맹자를 읽었고 아홉 살에는 논어를 읽었으며 열여섯 살에 향시에 합격할 정도로 수재였다.

21세부터 퇴계 문하에서 근사록을 배우며 학봉 김성일과 동문수학했다. 퇴계는 총명한 서애를 보고 앞으로 국가의 동량이 될 사람으로 예언했다. 25세에 문과에 응시해 합격한 뒤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벼슬길에 나섰다. 31세에 홍문관 수찬으로 보임됐고, 40세에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며, 이듬해 대사간과 도승지 및 대사헌에 제수되면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서애 류성룡의 초상화.
42세에 경상도 관찰사, 이듬해 예조판서로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귀향했다. 49세에 우의정에 올랐고 이듬해 좌의정으로 승차했다. 50세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의정으로 올랐다가 하루만에 파직됐다. 그 해 12월 평안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왜군 첩자 40여 명을 체포하여 참수했다. 51세 때 평양을 탈환하면서 호서, 호남, 영남 3도 도체찰사로 임명됐고,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명나라 군에서 조총, 화포 등의 제조기술을 배우게 하였으며, 영의정에 임명되어 전쟁에 대처했다.

54세에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 도체찰사로 임명되자 관영제철소를 설치하고 대포, 조총 등의 무기를 제작했다. 56세에 정유재란이 일어나 조정에서 이순신에게 죄를 주자 사직소를 올렸다. 57세 때 이순신이 전사하자 삭탈관작 됐다.

63세 때 징비록 저술을 마쳤고 66세(1607년, 선조 40)로 일생을 마쳤다. 서애의 빈소에는 수많은 민초들이 “류공이 아니었으면 우리 백성들은 왜란 중에 살아남지 못했다.”고 호곡을 할 정도로 난세의 영웅이었다.

서애는 학봉 김성일 등과 퇴계의 학통을 계승했다. 학봉은 제자들에 의해 호계서원을 중심으로 학맥이 이어졌고, 서애의 학맥은 병산서원이 중심이 되어 이어지니 안동지역 퇴계학파의 양대산맥이 되었다.

서애의 학문은 다방면에 걸쳐 박식하며 폭이 넓다. 시문·경사·도학·의례·군사·의학 등 여러 분야에 해박하였고, 무엇보다 실천을 중시했다. 경세제민과 예악에 관심이 깊었으며, 중국의 병법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활용하여 군사조련에 응용하였고, 양명학과 불교에도 지식이 출중하였고 지행합일을 중시했다.

그의 제자 정경세는 “서애선생은 국사를 맡음에 넉넉하였고, 학문은 실용에 모자람이 없도록 치밀하였다.”고 평했다.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절충의 리더쉽, 인재등용으로 극복한 국난

서애는 30여년 간 관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귀양 한 번 가지 않고 요직에서 국가를 이끈 지도자였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남에겐 봄날의 바람과 같이 따듯하게 대하고, 자신에겐 가을날 서리와 같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절충과 조정, 인재등용의 공정 등 현대인에게도 귀감이 될만한 탁월한 경영능력의 소유자였다.

예컨대 31세 때 홍문관 수찬으로 경연에 참석한 어느날 선조는 갑자기 “경들은 과인을 어떤 임금으로 생각하시오.”라고 질문하자 정이주는 “전하께서는 요·순 임금과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조가 흡족히 여기는 순간에 강직하기로 소문난 김성일은 “전하는 걸(桀)·주(紂)와 같은 임금이 될 수도 있사옵니다.”라고 대답하자 선조는 포악하기로 이름난 걸왕과 주왕에 자신을 비유한 김성일의 직언에 대노하였다.

신하들이 모두 겁에 질려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서애가 나서 “한 분은 요·순에 전하를 비교하여 훌륭함을 말씀드렸고, 한 분은 걸·주에 비유하여 경계의 뜻을 나타낸 듯합니다. 두 신하가 모두 전하를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에서 사뢴 말씀입니다.” 주위의 경연관들과 선조도 기지에 넘치는 서애의 답변에 비로소 흡족해 하였다. 이와 같이 서애는 탁월한 조정능력의 소유자로서 훗날 처절한 당파싸움 속에서도 순탄한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던 절충과 조정의 일인자였다.

인재 등용에 관한 서애의 확고한 입장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원동력이 됐다. 그는 인재를 채용할 때 자질과 특기를 중시했다. “인재는 대소장단이 있지만 재질에 따라 활용하면 모두 쓸모있는 그릇이 된다. 단지 인재가 부족한 현상은 구하는 길이 넓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군인의 경우에는 “재주와 지혜, 견식과 사려가 깊고 병법에 밝은 사람은 장수에 적합한 인물이고, 용감하고 활·칼·창을 잘 쓰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도 빨리 달릴 수 있거나 담력이 커서 겁내지 않고 적진에 들어갈 사람은 군인으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인재 등용기준을 제시한 서애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과 이순신의 발탁으로 큰 공적을 올렸다. 권율은 이치(梨峙) 전투에서 승리하여 왜군이 전라도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서울수복을 위해 북상하다 수원부근의 독성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행주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함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올리고 왜군을 남쪽을 후퇴하게 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 등에서 연전연승을 하여 왜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막아냄으로써 임진왜란의 영웅이 됐다. 서애가 권율과 이순신을 천거하지 않았다면 임진왜란의 승리는 불가하였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재를 알아보고 추천한 서애의 혜안을 엿볼 수 있다.

◆과거를 반성하여 미래에 대처하라

서애는 하회마을 맞은편에 정사를 세우려 하였으나 청백리로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산승(山僧)이 자청하여 10년 동안 시주를 거두어 선조 19년에 옥연정사를 완성했다. 임란이 끝날 무렵 조정에서 은퇴하여 향리에 내려온 뒤 옥연정사에서 징비록을 썼다. 그는 조선 최고의 군략가로서 ‘징비록’을 통해 국난극복의 메시지를 후대에 전하고 있다.

징비록.


‘징비록(懲毖錄)’은 ‘시경(詩經)’의 징전비후(懲前毖後)에서 따왔다. 징전비후는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미래에 대비한다”는 뜻이다.

서애는 징비록에서 “이제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는 다만 뒷날에 경계로 삼아야 하겠기에 자세하게 적는다.”라는 기록으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징비록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조선의 산하를 피로 물들인 임진왜란에 대한 회고록이다. 50세(선조 24) 좌의정에 오르자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군정의 최고책임자인 도체찰사와 병조판서를 겸임하면서 정치·외교·군사업무를 총괄한다. 7년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593년부터 1598년까지 영의정으로 군정의 최고위직으로 체험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예컨대 전쟁 초기 연패를 거듭하자 조선 제1의 명장으로 이름난 신립이 충주로 급파되어 탄금대 일대에 진을 쳤다. 중국 초·한전의 명장인 한신이 등 뒤에 강을 두어 더 이상 군사들이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을 친 전쟁에서 성공한 것을 흉내내었지만 새재처럼 험준한 군사적 요새를 버린 것은 큰 실책이었다.

서애는 징비록에서 패배이유를 분석하였다. “적이 상주에 있을 때 신립과 이일 등이 토천(兎遷) 새재의 몇 십리 사이에 활 잘 쏘는 군사 수 천명을 매복시켜 적이 아군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게 하였다면 능히 적을 막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장수들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그 험한 요새는 버려둔 채 평지에 나와 싸웠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토천은 오늘날 3번 국도의 마성면 진남휴게소 일대인데 깍아지른 절벽 위에 고모산성까지 있어 상주에서 문경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사람 하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요충지였다.

이렇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요새를 버리고 벌판에서 배수진을 치고 기병전을 계획했지만 수풀이 있어 말이 달릴 수 없었고 두 방면에서 협공하는 적을 두고 척후를 내보내지 않아 대비가 부족했으며 수십보 밖에 나가지 못하는 활로 수백보를 나르는 조총을 당해낼 수 없었던 점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있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전체 국면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이자 현재에도 유용한 국가전략서이며, 현대인에게 전하는 국난극복을 한 리더쉽의 모델로 평가 받고 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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