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두 마리가 낭창하니 날갯짓을 한다. 추상적인 나뭇가지 끝에 마주 보고 앉아있는 모습이 어느 마을 솟대를 연상시킨다. 은실은 햇살을 받아 윤슬처럼 반짝이고 청실과 홍실로 엮은 열매와 과실은 떨어질듯 탐스럽다. 불꽃이 절정일 때처럼 크고 환해지며 점점이 분명해져 온다. 색실이 밝고 윤택해서 평면에 박혀 있는 것들이 박차고 나올 듯 힘이 있어 보인다. 절제된 자연물이 성스럽고 영험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 듯싶다.

멀리 야트막한 산지와 구릉으로 둘러싸인 소도시가 흐릿하게 다가온다. 아련한 마을에서 천년고도 고령 가야국의 혼과 얼이 느껴진다. 함창은 예로부터 누에고치에서 나온 명주실이 유명한 고장이라고 한다. 발길을 명주 박물관으로 돌렸다. 전통 물건부터 요즘에 맞게 재해석한 작품까지 구경거리가 즐비하다. 그중 소담스럽게 펼쳐져 있는 조각보에 시선이 꽂혔다. 예전 우리네 일상에서 없어선 안 될 소박한 보자기가 품격 있는 자태로 변모해 있었다. 고운 명주 선을 따라 정성껏 바느질 되어 있는 조각보를 보니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신행 후 시댁 어른들께 처음으로 인사 가는 날이었다. 선명한 색감이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듯 야무진, 청홍색 함지와 술병이 상 위에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불행은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저만치 가라고 그러면서도 복은 한껏 받으라는 소원을 담았다. 이바지 음식과 술병을 소중히 감싸고 있는 수보(繡褓)가 부모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딸이 혹여 눈 밖에 날세라 겉싸개까지도 신중히 선택하고 끝매듭 하나도 놓치지 않으신 그 마음을 그때는 다 헤아리지 못했다. 음양오행을 품고 양면을 곱디고운 수로 장식한 서로 색이 다른 겹보자기가 여러 날 들인 수고와 정성을 하나도 남김없이 품어 주고 있었다.

서양의 가방이 입체적이라면 우리네 보자기는 평면적인 것 같다. 가방은 그 크기와 모양에 맞는 물건만 용납하지만 보자기는 담고 싶은 물건이 크든 작든 자신의 형태를 고집하지 않는다. 자기가 감쌀 내용물에 맞게 언제든 변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싸고 풀고’ 본연의 임무를 다하면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다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조용히 평면이 된다.

우리 고유의 색을 잘 입힌 조각보를 하나씩 들여다본다. 더 이상 일상 속 필수품이 아닐지라도 향수를 자극하기엔 충분하다. 대학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던 날 보따리가 대여섯 개는 되었던 것 같다. 부피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을 이불부터 자잘한 살림살이와 밑반찬 짐까지 그 많은 것이 용케도 다 들어갔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 시절 나는 늘어 가는 보따리 개수만큼 부끄러움도 더해져 갔다. “엄마, 가서 필요한 거 있음 만들어 먹든지 사든지 할게!” 하면서 하나라도 더 보내려는 부모님께 볼멘소리를 했었다.

그 이후로도 첫차를 타고 온 보따리가 자취방을 들락거렸다. 손수 먼 길을 들고 오신 음식과 그 안에 깃든 따스한 정을 그때는 온전한 마음으로 받지 못했다. 폼 나지 않는 천 조각이 한창 멋 부릴 시기에 내 체면마저 구겨 버리는 것 같았다. 비닐 옷장과 앉은뱅이책상 말고는 변변한 가구 하나 없던 초라한 자취방엔 이불장과 서랍장을 대신한 보따리가 구석진 곳에서 언제든 피난이라도 갈 것처럼 준비된 채 앉아 있었다.

보자기는 탄생과 성장, 소멸의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다. 젊은 날 떠도는 유목민처럼 서사를 찍어내던 시절, 한 늠름한 사내가 있었다. 안개 자욱한 새벽 대의를 품고 광활한 벌판으로 가야 했던 그의 옆구리에는 어김없이 보에 싸인 꾸러미가 매달려 있었을 게다. 이제 더 이상 갈 곳도 찾는 이도 없는 쇠잔한 노인은 험로역정(險路歷程)의 삶에서 내려와 과거를 회상하며 사그라지는 불꽃임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 그의 벽장 속엔 지난한 세월 동반자가 되어 주었던 색 바랜 보자기가 격랑의 역사를 삭이고 있을 것이다. 이 시점 생명과 무생물의 간극이 의미를 상실하고 그저 무량한 연민만이 느껴진다.

가방이 디지털식 기계음이 난다면 보자기는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한다. 봄날이면 외손자를 보러 먼 길을 달려오시느라 지친 할머니 머리 위에는 어김없이 노인의 작은 몸을 다 삼킬 만한 보따리가 버티고 있었다. “야야, 소금 좀 넣어 휘휘 저어 물 한 사발 가져오너라!” 하시며 큰 짐을 다 내려놓으실 때까지 손아귀 힘을 풀지 않던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 속에는 손자에게 주실 알사탕부터 딸 살림에 보탤 것까지 정성으로 그득했다. 아마도 자투리 천으로 덧댄 조각 보자기는 할머니의 너른 품을 닮은 것 같다.

중년의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난 세월 보자기가 되기보다는 서양식 가방이 되었던 것 같다. 상대가 나를 맞춰 주기를 내가 생각하는 대로 딱 떨어지기를 타인에게 강요했었다. 너무 느슨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쉽사리 밀어내고 내 안의 그릇을 스스로 정해 놓고 살았다. 이제서야 보자기를 통해 지나 온 삶을 되새겨 보게 되다니 우리는 늘 인생에서는 지각생인 것 같다.

뜯어야 하는 상자보다 ‘풀어야’ 하는 보자기는 그 어감이 부드럽고 무엇이 들어 있을지 궁금해서 좋다. 불쑥 드러내지는 않지만 나지막한 존재감이 있다. 소중한 물건을 감싸 안아주며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지만 보잘것없는 천에 담긴 호의는 무심히 흘러간다. 주는 사람 입장에서만 기억되는 사소한 것으로 비춰지기 십상이다. 백화점 쇼핑백이 난무하는 시대다. 언젠가 명품 백을 담은 포장 가방이 경매 시장에서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가격으로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흔하고 만들기 쉬워서 어쩌면 너무 격이 없는 품새여서 의미를 되새겨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귀한 선물을 보낼 때 사용하던 고급스런 예단 예물 보에서부터 생활 밀착형 조각보까지 우리네 친숙한 도구가 점차 사용이 축소되고 자작하던 전통 역시 없어지니 안타깝다. 택배 시스템이 아련한 추억과 사람 간에 느껴지는 그 살가움마저 가져 가버린 것 같다. 편리를 추구 하는 택배 상자는 문 앞에서 덩그러니 주인만 기다릴 뿐이다.

보자기의 ‘복(袱)’이 ‘복(福)’ 과 음이 같고 보자기에 싸는 내용물을 복에 비유해 복을 담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비록 한 장의 천이지만 이보다 쓸모 있고 소박한 미감을 가진 것이 있을까 싶다.

소도시 기행 중 우연히 접한 보자기에서 과거를 더듬어 보게 되다니 인생은 어쩌면 풀어봐야 보이는 보자기와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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