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도시/박주엽

발행일 2021-10-17 14:34:03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불빛 쏟아지는 혼잡한 도시/ 태어날 때 호롱불 아래서 반짝이던 눈빛/ 아련한 기억을 들추게 하는 방황적인 단어들// 광란하는 도시의 불빛 앞에 멈추었다가/ 클래식 울리는 골목길 가로등 아래로/ 잔잔한 파도의 음계가 가슴에 내릴 때// 지나온 삶의 흔적을 잠재우고 지나간다/ 흐르는 시간에 기대어 마음의 불빛 찾아/ 회색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못난이// 오늘 밤도 뜬눈으로 무거운 잠을 초대하는데/ 아침을 밝히는 코 고는 소리는/ 나를 또다시 삶의 한가운데로 서게 한다

「회색도시」 (그루, 2021)

회색은 색감과 채도가 없는 무채색의 일종이다. 자연광 아래 가시광선 전 영역에서 빛을 고르게 흡수 또는 반사하는 뒤태다. 어떻게 보면 색이랄 수도 없다. 회색은 고독하고 음울하여 무기력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세련된 감각이 밴 고고한 품격을 보여주기도 한다. 회색 도시도 회색이 갖는 메타포를 갖는다. 인간성이 매몰된 콘크리트와 어두운 아스팔트가 대자연의 천연색을 압도하는 상황을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묻어난다.

칠흑 같은 밤을 호롱불로 밝혔지만, 그 밑에서 빛나던 눈빛만은 보석보다 더 반짝이던 때가 있었다. 달이 인연의 끈을 맺어주고 별이 인생의 다채로운 화려함을 수놓아주던 시절이었다. 혹부리 영감과 도깨비방망이, 토끼와 계수나무, 견우와 직녀, 성황당과 반딧불이 기타 등등. 아련한 추억을 일깨워주는 편린들이 기억의 언저리를 헤맨다. 환한 불빛에 휘청대는 혼잡한 도시보다 별빛 쏟아지는 산골 마을의 정경이 더 푸근하고 정겹다.

무질서한 불빛이 미쳐 날뛰고 달콤한 쾌락이 유혹하는 도시의 밤에는 예쁜 추억은 더는 설 자리가 없다. 뒷골목의 은은한 불빛 아래 클래식 음악이 조용히 흐를 땐 길을 잃고 헤매던 아련한 추억들이 얼굴을 들고 미소 짓는다. 부질없는 허욕일랑 내려놓고 마음이 가는 대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편다. 허나 먹고사는 일이 발목을 잡고 현실의 벽을 허물 용기도 없다.

도시의 치열한 삶에 지쳐 영혼은 흐느끼고 몸은 녹아내린다. 도시의 각박한 생존경쟁이 삶의 여유를 쫓아내고 소중한 기억마저 지워버릴 터이지만 천박한 손길을 뿌리치지 못해 회색 도시를 떠나지 못한다. 고뇌에 찬 날들로 밤잠을 설치고 피폐한 영혼으로 실신할 지경에 이르고도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세월에 의지해 마음의 빚을 밝혀볼 뿐이다.

긴긴밤을 뒤척이며 뜬눈으로 꼬박 새울 때도 있지만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면 곯아떨어지기 일쑤다. 그리고 눈을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불면의 밤을 까맣게 잊고 또 무채색 도시에 몸을 던진다. 백팔번뇌가 깃든 회색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오늘도 삶의 한가운데로 나아간다. 고통은 피부에 와닿고 이상은 허공을 떠돌 따름이다.

도시의 삶이 인간성을 말살하고 치열한 경쟁이 행복을 빼앗아간다 해도 도시로 향하는 발걸음은 내일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사람이 떠난 시골은 활력을 잃고 인구가 집중되는 도시는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지만, 도시를 떠나는 길은 한적하다. 꿈을 찾아 회색 도시로 불나방처럼 날아들지만 꿈과 희망은 찾지 못한 채 허망한 불빛 주위를 방황한다.

여유가 생기고 여가가 날 때면 본능처럼 그때가 생각나고 잃어버린 기억들이 낡은 필름 속에서 명멸하지만 그래도 돌아갈 일은 없다. 박제돼버린 수구초심이 아쉽고 안타깝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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