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

로마 시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 경기는 검투였다. 검투는 원래 장례예식에서 유래했다. 검투 의식은 죽은 자의 영혼이 검투사의 호위를 받으며 저승으로 갈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씻김굿이었다. 후에 검투사의 싸움은 독립된 경기로 발전해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죽음의 혈투를 보는 것이 생의 목적처럼 여겨질 정도로 검투는 로마인에게 인기가 있었다. 포로나 노예 출신의 검투사가 싸우다가 한쪽이 쓰러지면 그의 생과 사는 흥분한 시민들이 결정했다. 엄지를 땅 쪽으로 내리면 죽음을 의미했다.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그 잔인성은 ‘오징어 게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오징어 게임’은 자타가 공인하듯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드라마로 냉혹한 경쟁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뒤틀리고 왜곡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생각 있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그 폭력성을 내면화할까 봐 우려한다. ‘오징어 게임’은 승자독식 문화구조의 어두운 이면을 투영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국민의 불안감을 악용해 부정적인 공격 대상을 만들고는 적개심을 부추겨 정치하려는 사람이 너무 많다. 앤드루 로버츠는 ‘CEO 히틀러와 처칠, 리더십의 비밀’에서 히틀러는 숭앙의 대상이 되는 영웅이 되고자 했지만, 처칠은 누군가를 북돋워 주는 리더가 되고자 했다고 말한다. 처칠은 문명화를 기반으로 한 가치 위에 강력한 대영제국을 건설하려는 비전을 국민에게 제시했다. 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끊임없이 부정적인 공격대상을 만들어냈고, 이들에 대해 국민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미래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자신은 그것을 깨부수는 영웅이자 불안과 공포를 거두어주는 메시아였다. 히틀러는 완전무결한 초인의 이미지를 형성해 스스로 숭배의 대상이 되려 했다. 김헌식의 ‘2인자 리더십’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가 제시하는 다양한 일화와 분석은 오늘의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경영 컨설턴트 김우형의 ‘리더십 바이러스’에 ‘리더십 RAV 바이러스’라는 말이 나온다. 그는 “리더가 되는 순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감(Responsibility)과 권한(Authority), 비전(Vision)에 대한 압박 때문에 책임감(R)을 부담감으로, 권한(A)을 권력으로, 비전(V)을 개인적인 야망으로 변질시키는 ‘리더십 RAV 바이러스’에 노출된다”라고 말하면서, 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이렇게 변한다고 설명한다. “갑자기 인기에 민감해진다. 직원들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듣는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상황에 따라 말을 쉽게 뒤집는다. 자신은 보기만 해도 다 안다고 믿는다. 고집이 세지고 반대 의견이 나오면 상대방이 항복할 때까지 논쟁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 정치판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대선판은 탈영웅 시대에 영웅적 리더십을 앞세우고 있다. 영웅적 리더십은 답을 제시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한다. 일정한 방향을 정하고 오직 그곳으로만 달려가길 강요한다. 살아있는 리더십이란 연속성과 변화를 적절히 결합한 리더십이다. 이는 답을 제시하고 그대로 따르도록 사람들을 설득하고 강요하는 행태와는 거리를 둔다. 조직의 집단적 지혜와 통찰력을 끌어낼 수 있는 능력이 진정한 리더십이라는 입장을 견지한다. 제임스 번즈 전 미국 윌리엄스 칼리지 교수는 ‘리더십 강의’에서 “대중에게 도덕적 판단과 시민 정신 등을 교육해 영웅숭배나 무질서한 욕구 분출의 비도덕성과 비민주성을 깨치도록 이끌어야 한다”라고 했다. 자신과 주변 추종자의 욕망과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영웅을 악용할 수 있다. 잘못된 영웅적 행동은 또 다른 폭력과 억압을 낳기도 한다.

이상적 모델로서 영웅은 필요할 수 있다. 바람직한 지도자상으로 생각하면 된다. 서양인 최초의 동양불교 수행자이자 인권운동가인 미국 컬럼비아대학 로버트 서먼 교수가 “지금은 차가운 영웅이 필요한 시대”라고 한 말을 떠올려본다. 지성적이며 통찰력이 있지만, 증오와 분노에 휩싸이지 않는 리더가 ‘차가운 영웅’이고 군중을 움직이는 힘은 있지만, 증오와 분노에 빠진 리더가 ‘뜨거운 영웅’이다. 상식과 이성을 저버린 우리 정치와 증오와 분노를 부추기는 정치가를 퇴출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차가운 머리가 필요하다.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윤일현(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대표)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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