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입선-이선옥 ‘법화경(法華經), 연밭에서 읽다’

발행일 2021-11-28 17: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초록 연잎 위에 영롱한 물방울이 동글동글 맺혀 있다. 부처님이 세상을 밝히라고 보내신 전령인가, 받들어 올린 꽃대 위에 수천의 연등이 불을 밝힌다. 지금 나는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에 있다.

산책로에 넘쳐나는 사람들이 제등행렬을 하는 듯하다. 연꽃마다 사월 초파일 절 마당을 밝히던 연등과 겹쳐진다. 부처님의 가피력을 청한다. 사상 유례없는 역병을 소멸하고 마음이 맑아지게 해 달라고.

바람이 연꽃 대궁이를 흔들지만 아직 이르다고 침묵하는 봉오리에서도 촛불의 불꽃이 어린다. 만개한 꽃이 향기를 날리다가 가장 아름다울 때 자신을 버리고 씨앗을 잉태한다. 연밭을 빛나게 하는 것은 연잎과 꽃봉오리나 활짝 핀 꽃만이 아니다. 조신하게 내생을 기다리는 연실(蓮實)을 품은 연방(蓮房)도 이들과 섞여 한몫을 한다.

연꽃은 진흙 속에 뿌리를 내리고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깨끗한 꽃을 피워 순결과 청정함을 상징한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를 이 꽃에 비유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언제나 연화대에 앉아 계시나 보다. 연꽃의 빛깔이 맑고 그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는 것은 군자의 덕행이 널리 영향을 미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유교의 선비들도 연꽃을 가까이하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초파일 저녁 불국사에 간 일이 있었다. 불교에 심취한 어머니가 내게 모태 불교를 심어준 것처럼 아이들에게 사찰 문화를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절 마당에 달린 연등에 초를 꽂는 일을 도왔다.

저녁 기도가 끝나자 연등을 들고 탑돌이를 했다. 요즘은 전구로 등을 밝히지만 그때만 해도 초에 불을 붙여 일일이 연등 속에 꽂았다. 초를 삐뚤게 꽂으면 등이 불에 타고, 더러는 바람에 촛불이 꺼지는 수도 있었다. 아이들은 연등을 들고 다보탑과 석가탑을 돌면서 즐거워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더 밝아지던 장엄한 세상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어머니는 스스로 터득한 글공부로 붓을 잡고 사경까지 하셨다. 98세 일기로 돌아가시기 두 해 전까지 법화경 언해본을 5권이나 사경하여 자식들에게 한 권씩 나눠주셨다. 우리들에게 불성을 심어주려는 마음에서였으리라. 컴컴한 호롱불 아래에서 긴 세월을 사경에 매달렸으니 몸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래도 법화경을 만나서 마음은 열락의 세상을 살다 가셨지 싶다.

법화경이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인 말이다. 뿌리는 진흙 속에 있을지라도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 그것이 법화경 정신의 바탕이다. 보살이 중생들 가운데 있으면서도 중생들의 습성인 흐트러짐, 더러움, 갈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중생 속에서 향기를 풍기면서 부처님의 묘하고 바른 가르침을 중생에게 일러주라는 계시도 담고 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의견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할 때가 있다. 남편이 하는 일이 마땅치 않을 때도, 자식들이 서운한 적도 더러 있다. 때로 억울해서 슬퍼하고 짜증을 부리기도 한다. 그런 일로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말본새가 나빠지고, 생각이 흐려지게 되어서 괴롭다. 그럴 때면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인 어머니의 법화경을 생각하곤 한다.

매년 7,8월이면 연밭을 찾는다. 법화경의 세계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다. 올해도 예외 없이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이다. 장엄한 법화경의 세계가 펼쳐진다. 뻘 속에 발이 잠기고도 불쾌한 기색 없이 해맑게 웃고 있는 연꽃 앞에 서면, 고요하고 청정한 기운에 불평은 사라지고 아름다운 향기로 정신이 맑아 온다. 부정적인 생각을 털어내고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여기서 배운다. 부처님의 염화시중(拈華示衆)에 가섭존자의 미소가 보이고 노쇠한 내 어머니도 보인다.

법화경은 30년째 책꽂이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 한지로 맨 공책은 상하권의 규격이 달라 어눌하게 묶여 있다. 어머니는 말 대신 손수 사경하신 한 권의 경전으로 천금 같은 가르침을 주고 싶으셨던가 보다. 연꽃이 더러운 물 한 방울도 허락하지 않듯 자식들의 삶이 힘들더라도 유혹이나 나쁜 습성에 오염되지 말라는 간절한 기도였으리라.

돌아가신 분이 쓴 것이니 스님께 부탁하여 태우라고 하지만 엄마의 인생관이 담긴 이 책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어머니는 떨어진 한쪽 안경다리에 실을 매달아 귀에 걸고 붓으로 사경을 하셨다. 10만 자를 넘게 다섯 차례나 쓰신 당신의 정성을 생각하면 어찌 없앨 수 있겠는가.

동궁과 월지 연꽃단지에 법화경이 펼쳐진다. 바람이 책장을 넘기고 연꽃들이 일제히 일어나 법화경을 낭송한다. 초록 연밭 위로 백로도 흰 날개를 펄럭이며 법화경을 읊는다. 나도 어머니의 법화경을 읽는다. 어머니가 연밭 어디에선가 바람, 햇빛과 더불어 작은 기쁨을 새기고 있는 듯하다.

연꽃에 취해 있다가 시나브로 발길을 돌린다. 넓고 둥근 초록의 이파리와 연꽃이 일제히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진흙 속 연꽃처럼 번뇌 속에서도 늘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라 한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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