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141>경덕왕

발행일 2021-11-29 08:18:36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효성왕 뒤 이은 경덕왕…불국사 건립 등 신라 최고 전성기 누려

신라 35대 경덕왕의 릉은 궁중에서 한참 벗어나 내남면 부지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2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무복을 입은 십이지신상으로 조각된 호석이 둘러져 있다.


통일신라 최고의 전성기는 35대 경덕왕이 다스리던 때라고 평가하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불국사의 다보탑과 청운교백운교, 석굴암 등의 정교하면서도 우아하고, 기묘한 과학을 담은 예술성이 뛰어난 불교문화 유적에서 나타나는 화려한 문화예술은 지금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나다.

경덕왕의 충담스님과 대화에서 나타나는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왕의 마음은 역사적으로 훌륭하게 조명되고 있다. 불국사와 석굴암 건축, 월정교 설치, 성덕대왕신종 제조 등의 통일신라 전성기를 만들었던 노력도 경덕왕의 훌륭한 업적으로 손꼽는다.

경덕왕 당시의 화려하게 꽃피운 문화와 다르게 왕의 아들을 낳기 위한 지나친 욕심과 어린 아들에게 물려준 왕위로 인해 신라가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를 만드는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됐다.

삼국유사는 경덕왕이 표훈대덕을 통해 천제에 부탁해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어 없던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8살에 혜공왕으로 즉위해 24살 되던 해에 시해를 당하고 신라는 왕권전쟁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며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경덕왕릉으로 진입하는 도로가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숲으로 조성돼 있다.


◆경덕왕

대부분 역사서는 경덕왕의 이름은 헌영이며 효성왕의 동생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경덕왕은 효성왕과 이복 형제였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경덕왕의 첫 번째 왕비는 김순정의 딸 삼모부인이지만 아들이 없어 내쫓고 둘째 왕비를 맞았다. 둘째 왕비는 서불한 김의충의 딸인 만월부인이다. 만월부인도 아들이 생기지 않아 경덕왕이 표훈대사를 통해 천제에 부탁해 늦게 아들을 낳았다.

경덕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방 군현을 정비하고 지명을 고치는 한편 관직의 명칭을 변경하는 등 제도를 정비하며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불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불국사, 석굴암, 삼랑사 등의 절을 짓게 하고, 스님이 될 수 있게 길을 열어 훌륭한 승려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때 신라에 충담을 비롯해 월명, 경흥스님, 표훈대덕 등의 고승들이 등장했다.

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하는 길에 땅 속에서 목탁소리가 들려 파보니 사면에 부처가 새겨진 바위가 나와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굴불사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보물 제121호로 지정된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


또 경덕왕은 스스로 나라 안의 절을 찾아 법문을 듣기도 하고 법회에 참가해 많은 시주를 하기도 했다.

절을 지으면서 불상과 탑을 안치하는 과정에 건축기술은 물론 미술, 조각, 과학, 문학 등 종합문화예술과 전반적인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이러한 문화의 발달을 통해 백성들의 의식수준도 성장하고, 나라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경덕왕이 아들 낳기에 공을 들여 성공했으나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나라가 혼란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경덕왕의 뒤를 이어 아들 건운이 8살에 신라 36대 혜공왕으로 등극했다. 어머니가 내정을 다스렸지만 귀족들의 권세에 휘둘려 신라의 국운은 패망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비운을 맞았다.

경덕왕이 김대성에게 지시해 지은 불국사의 청운교백운교를 떠받치고 있는 석조구조물. 아취형으로 조성돼 지진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청운교백운교는 국보 제23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덩달아 신라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던 문화예술조차 쇠퇴의 길을 걸어 불국사와 석굴암의 아름다운 예술작품들은 더이상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쇠퇴의 길을 걸었다.

◆충담스님

경덕왕은 백성들에게 존경 받는 왕으로 남고 싶었다. 그래서 먼저 아버지 성덕왕의 업적을 기리는 일을 위해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게 했다. 이어 아버지처럼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성군이 되기 위해 덕망 높은 승려를 초빙해 길을 묻기도 했다.

하루는 대신들에게 추천을 받아 충담스님을 모셔오게 했다. 충담은 여기저기 떠다니며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도와주기로 유명했지만 어디에서 사는지 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충담은 그의 거처가 불분명한 것처럼 그의 행적 또한 신비스러웠다. 그의 걸음걸이는 보통 사람과 같았으나 자세하게 보면 엄청난 속도로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서라벌 북쪽 마을에 어린아이가 북천 깊은 물에 빠졌는데 아무도 건질 엄두를 못 내고 있었으나 충담스님이 뛰어들어 아이를 구했다. 그 아이의 부모들이 감사 인사라도 전하려고 스님의 뒤를 아무리 뛰어 쫓았으나 천천히 걷는 스님의 걸음을 따라잡지 못했다.

불국사 당간지주는 다른 절터에서는 보기 드물게 두쌍의 당간지주가 나란히 서있다. 유형문화재 제446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왕이 충담스님을 찾아오라고 명했으나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왕이 남산 나들이에서 돌아오는 길에 월정교 누각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마침 허름한 옷을 걸친 스님이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범상치 않게 보여서 왕이 그를 모시고 오게 했다.

왕이 “스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더니 “충담이라고 하옵니다”고 대답했다. 왕이 깜짝 놀랐으나 태연하게 “어디서 오시는 길입니까”라고 또 물었다. 충담은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하고 오는 길입니다”고 답했다.

왕이 차 한 잔을 청하자 충담이 기꺼이 차를 달여 올렸는데 왕이 차를 마시는데 차의 맛이 특이하고 그윽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신라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석조구조물을 꼽으라면 단연 첫 손가락에 드는 불국사의 다보탑. 국보 제20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차를 마시고 왕이 “과인이 들어보니 스님께서 화랑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는데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노래를 지어줄 수 있는지요”라고 청했다. 이에 충담사는 안민가를 지어바쳤다.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다/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로 생각하신다면 백성들이 나라의 사랑을 알 것입니다/ 꾸물거리며 사는 백성들은 이를 먹임으로써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랴/ 백성들이 말한다면 나라가 유지될 줄을 아실 것입니다/ 아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처신한다면/ 나라 안이 태평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경덕왕이 충담의 노래를 듣고, 존경해 나라의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지만 충담은 거듭 사양하고 총총히 일어나 자리를 떠나갔다.

충담스님은 매년 3월3일과 9월9일에 남산 미륵세존에 차를 공양했다. 이를 이어받아 경주지역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충담재를 열어 충담스님을 추념하는 한편 남산 삼화령을 찾아 차 공양 의식을 재현하고 있다.

경덕왕때에 조성한 기적적인 과학을 자랑하는 석굴암 본존불.


◆신라 최초 왕 시해 사건

경덕왕은 나이가 들면서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생기지 않아 걱정을 하면서 표훈대덕에게 자주 고민을 털어놓았다.

결국 경덕왕은 새로 왕비를 맞아 들여 늦게 아들을 보는데 성공했다. 왕의 늦둥이 아들 건운이 5살에 태자로 책봉되고, 8살에 왕위에 올라 효성왕이 됐다.

어린 왕이 등극하자 어머니가 섭정을 하게 됐고, 경덕왕 대에 안정적으로 왕권을 강화했던 체제가 무너져 다시 귀족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왕권을 둘러싼 정쟁이 심각하게 일어났다.

혜공왕 즉위 4년에 대공과 대렴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찬 김은거를 중심으로 왕의 군사들이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했다. 김은거는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시중에 임명됐다. 이때 시중이었던 김양상은 반란에 관련이 있다는 책임으로 물러나야 했다.

770년에 김융이 혜공왕의 인사정책 등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융의 반란에 대한 책임으로 김은거는 시중에서 물러나야 했다.

768년 시중에서 물러났던 김양상은 귀족들의 세력을 모아 774년에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상대등이 됐다.

경주 보불로에 신라시대 역사문화유적의 과학을 분석연구할 수 있도록 석굴암과 성덕대왕신종, 첨성대 등의 유적을 복원하고 있는 신라역사과학관의 석굴암 재현 모습.


김양상의 반대파이자 친 혜공왕 세력으로 분류되는 김은거와 이찬 염상 등은 김양상에 반대해 두 차례나 크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했다.

780년에는 김양상의 세력을 제거하고 실권을 잡으려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오히려 김양과 김경신의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이때 김양상과 김경신 일파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어 혜공왕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경덕왕이 애써 얻은 아들이 8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8년만에 죽음을 당하면서 신라시대 최초의 왕 시해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를 계기로 신라 하대의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이어지면서 1천 년 신라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란을 진압하고 왕을 시해한 김양상은 김경신의 추대를 받아 스스로 왕위에 올라 37대 선덕왕이 됐다.

선덕왕 김양상은 내물왕 10대손이다. 선덕왕의 아버지는 성덕왕의 사위로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이다. 선덕왕이 시해한 혜공왕과는 외사촌 간이다.

반란을 진압하고, 김양상이 왕위에 오르는데 일등공신이었던 김경신은 상대등에 임명돼 병권은 물론 실질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넣었다. 내물왕의 11대손이었던 김경신은 다시 선덕왕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38대 원성왕이 됐다. 본격적인 왕권을 둘러싼 전쟁의 막이 올라 신라는 패망의 길을 걸었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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