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스/ 하창수

발행일 2021-12-01 10:16:37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 수호천사 ~

… 도로가 끊어졌다. 차가 서자 남자는 여자에게 커피 한잔을 주었다. 여자는 부질없이 이것저것 캐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차에서 내렸다. 남자는 여자의 폰을 넘겨받아 전원을 껐다. 남자가 숲으로 들어가자 여자도 뒤따라갔다./ 첫 소설집 원고를 넘긴지 17개월, 다른 작가의 책에 밀려 또 출간을 연기해야 한단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고분고분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슈피겔’이란 폴더를 열고 ‘가이드’ 파일의 ‘로미오의 눈물’을 클릭했다. 혜진의 닉네임 ‘봉고’가 등록됐다./ 혜진은 5년 동안 공을 들인 끝에 소설가로 등단했다. 당선 연락을 받자마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벅찬 마음이 느껴졌다. 슬픔이 기쁨과 뒤섞였다. 아빠가, 봉고차 안의 그 매캐한 냄새가 떠올랐다./ 혜진은 악몽 속에 아빠와 늘 함께 했다. 악몽을 꾸지 않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혜진은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말과 생각이 끌고 가고 또 말과 생각에 끌려 다녔다. 아빠를 마지막으로 본 건 봉고차 안이었다. 봉고차에서 나던 냄새를 잊을 수 없었다. 혜진은 ‘봉고’를 닉네임으로 썼다./ 숲길 끝에 큰 굴참나무가 있었다. 나무 아래서 남자는 커피를 권했다. 남자는 깔개를 두 개 꺼내 깔았다. 혜진과 남자가 나란히 앉았다. 까마귀가 울었다. 마음이 가라앉고 슬픔이 걷혔다. 혜진의 머릿속이 점점 하얘졌다./ 아빠는 영문과를 나온 번역가였다. 거울 속으로 사라진 사람의 얘기를 다룬 소설을 끝으로 번역 일을 접고 자동차 부품 운송 일에 종사했다. 고교 2학년, 전국 모의고사가 끝난 다음날이었다. 아침 7시쯤 아빠의 ‘사랑한다’는 카톡을 확인했다. 그 시간쯤에 아빠는 고속도로에서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혜진은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악몽과 유령이 시간 속의 존재로 그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봉고차 안의 매캐한 연기냄새가 났다. 알바를 하던 물류창고 구석에서 울고 난 뒤, 마음을 굳혔다./ 남자가 종이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 스위스의 자살 조력 병원에서 제공되는 농축일산화탄소로 된 알약의 복제품이 들어있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과 살고 싶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혜진은 하얀 알약을 혀 위에 올려놓았다./ 잠이 깊었다. 어느 순간 눈을 떴다.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굴참나무 위로 별들이 반짝였다. 눈물이 났다. 가이드 중에 간혹 수면제를 주는 사람, 수호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낯익었던 그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가이드 ‘로미오의 눈물’은 대학로에서 봤던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역 배우였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터다. 부모의 죽음을 천붕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연유다. 슬픔이 지나치면 정신 줄을 놓게 된다. 일이 꼬여서 잘 풀리지 않게 되면 삶의 의욕마저 잃기 일쑤다. 실패가 거듭될수록 절망감이 깊어진다. 슬픔과 절망감은 감정을 걷잡을 수 없도록 증폭시킨다. 아빠의 갑작스런 죽음과 함께 찾아온 악몽은 슬픔과 절망감의 합작품이다. 마지막 문자, 사고, 자책. 첫 소설집 출간이 지지부진하다. 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뜻이다. 이런 틈을 타 극단적 생각이 싹 튼다. 자살 사이트에서 가이드를 찾아 실행에 나선다. 그가 수호천사로 변신한다. 새 생명을 얻은 만큼 새 출발이 기대된다. 문득 이물질을 품은 진주조개가 떠오른다.

오철환(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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