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승 형제 조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왕위 쟁탈로 신라는 패망

▲ 경주시가지에서 100리나 떨어진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흥덕왕릉.
▲ 경주시가지에서 100리나 떨어진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흥덕왕릉.


신라시대의 하반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38대 원성왕 시절이다.

원성왕은 14년의 집권을 끝으로 손자에게 왕위를 넘겼다. 39대 소성왕은 할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1년 만에 사망해 왕위는 어린 아들에게 넘어갔다.

13세에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40대 애장왕은 숙부 언승의 섭정으로 나라살림을 꾸려갔지만 성년이 되면서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제대로 나라를 경영하고 싶은 욕심을 냈다.

그러면서 숙부와 갈등을 겪어야 했고 결국 숙부 언승 형제들에게 시해를 당하는 비운의 왕이 됐다.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헌덕왕 언승은 18년간의 집권 끝에 동생 수종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수종은 지극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전해지고 있는 42대 흥덕왕이다. 그러나 흥덕왕 또한 아들이 없이 죽자 왕족들의 권력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신라는 멸망의 길을 빠르게 걸었다.



48대 경문왕이 화랑 출신으로 지혜로움 덕분에 헌안왕의 사위가 되면서 왕권을 이었다. 경문왕의 세 자녀가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으로 나란히 대업을 잇는 기록을 보였지만 기울기 시작한 신라 중흥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 흥덕왕릉 진입로인 남쪽 언덕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다. 봄과 가을에는 안개에 휩싸인 솔밭을 촬영하려는 작가들이 줄을 이어 찾는다.
▲ 흥덕왕릉 진입로인 남쪽 언덕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다. 봄과 가을에는 안개에 휩싸인 솔밭을 촬영하려는 작가들이 줄을 이어 찾는다.




◆소성왕의 형제들

원성왕의 큰 아들 인겸은 아들 6형제를 두고 태자에 임명됐지만 일찍 죽으면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다만 인겸이 태자에 올라 그 아들들도 모두 일찍부터 왕궁에서 왕손의 수업을 받았다.



원성왕은 아들 인겸이 죽자 둘째 아들을 태자로 삼았지만 또 죽어버리자 큰 아들의 큰 아들, 손자 준옹을 태자로 선정했다.



준옹은 여섯 형제의 맏이답게 성품이 온화하며 인자하고 지혜로웠다. 그는 형제들과 학문을 배우는 데서는 단연 뛰어났다. 그러나 예능과 무술공부에서는 둘째 언승을 확실하게 뛰어넘지 못하고 엇비슷한 실력으로 겨뤘다.





▲ 1970년대 흥덕왕릉 주변에서 ‘흥덕’ 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편을 발견해 몇 곳뿐인 신라왕릉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비편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 1970년대 흥덕왕릉 주변에서 ‘흥덕’ 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비편을 발견해 몇 곳뿐인 신라왕릉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비편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둘째 언승은 지는 것을 싫어해 형제들이 편을 나눠 훈련할 때에도 비교적 무술에 뛰어난 자질을 보이는 넷째와 다섯째인 수종과 충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형과 대결했다.



언승은 지나친 승부욕으로 훈련에서도 막무가내로 공격을 퍼부었다. 상대편이 형제이든 누구든 가리지 않고 부상조차 고려하지 않고 저돌적으로 달려들어 자주 의료진이 동원됐다.



준옹이 태자에 임명되고 왕위에 오르기 1년 전, 신년을 기념해 형제들과 무인들이 각자 30여 명씩 편을 지어 진행한 고지 탈환전에서 언승은 상대편의 수장인 형 준옹의 옆구리를 목검으로 깊숙하게 찔러 큰 부상을 입혔다. 당시 부상 때문에 준옹은 왕위에 올라서도 계속 치료를 했지만 결국 큰 병으로 도지는 바람에 1년 만에 불귀의 객이 돼버렸다.



소성왕은 동생 언승의 급하면서도 거칠 것 없이 행동부터 하고 보는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소성왕은 언승을 비롯해 동생들을 불러놓고, “언승이 상대등의 직위를 맡고 동생들과 함께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올라도 나를 보듯 나랏일을 잘 보살펴라”고 당부했다.



▲ 지금 남은 신라시대의 귀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북이 등에 비편을 새우기 위한 홈을 파지 않고 평면에 몸돌을 그대로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 지금 남은 신라시대의 귀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거북이 등에 비편을 새우기 위한 홈을 파지 않고 평면에 몸돌을 그대로 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언승은 소성왕이 죽고 조카 청명이 40대 애장왕으로 즉위하자 상대등의 직위에 올라 왕의 업무를 섭정하면서 실질적인 권력을 손아귀에 넣고 나라살림을 좌지우지 했다.



언승은 어린 조카가 왕좌에 앉아 있었지만 안중에 두지 않고, 병권과 인사권은 물론 모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소성왕이 어릴 때는 숙부의 횡포에 가까운 섭정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애장왕은 20세가 되면서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원성왕의 유지에 따라 독서삼품과 등의 제도를 운용하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삼촌의 실권에 부딪쳐 갈등을 겪게 됐다.



동생들과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정치를 하던 언승은 어린 조카가 성인이 되면서 점차 간섭의 수위를 높이자 스트레스를 받게 됐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그냥 넘길 언승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조차 용포를 입은 조카를 오히려 꾸중하기도 하고, 면박을 주면서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애장왕도 이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삼촌의 말에 목소리를 높여 대꾸하며 왕으로서 신하에게 힐책하는 언사를 동원하기도 했다.





▲ 신라시대 왕릉 중에서 난간석까지 설치한 왕릉은 원성왕릉, 헌덕왕릉, 성덕왕릉, 김유신 장군묘 등 몇 기가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난간석이 없는 곳은 흥덕왕릉이 유일하다. 남은 조각이 하나도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 신라시대 왕릉 중에서 난간석까지 설치한 왕릉은 원성왕릉, 헌덕왕릉, 성덕왕릉, 김유신 장군묘 등 몇 기가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난간석이 없는 곳은 흥덕왕릉이 유일하다. 남은 조각이 하나도 없어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조카의 변화가 못마땅한 언승은 어느 날 동생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술자리를 마련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며 취기가 적당하게 오를 즈음 주변을 물리고 조용하게 생각을 정리해 동생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요즘 조카 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우리 형제들을 숙청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가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우리는 물론 가족들과 우군들의 생명을 담보할 수도 없다”면서 “미리 군사들을 모아 손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형의 말이라면 절대적으로 따르던 수종과 충공은 무릎을 세우면서 “이거 큰일 날 일이군요. 당장 정리합시다”며 흥분해 오히려 언승을 앞질러 갔다.



언승은 미리 준비했던 시나리오대로 소성왕을 제거할 계획을 하나하나 치밀하게 설명했다. 형제들은 바람이 심하게 불고 달도 없는 깊은 밤을 틈타 몸이 날랜 병사 20여 명씩만 변복을 시켜 대동하고, 왕의 처소로 직접 들어가 목을 베었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고 달려온 소성왕의 동생 체명도 그 자리에서 바로 목을 베어 후환을 말끔하게 없앴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소성왕이 지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했다고 발표하고, 언승은 스스로 신라 41대 헌덕왕으로 즉위했다.





▲ 흥덕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헌덕왕릉의 난간석 모습.
▲ 흥덕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헌덕왕릉의 난간석 모습.




◆왕위 쟁탈전

헌덕왕과 흥덕왕에 이어지는 20여 년의 시간에 내정은 어지러워지고 김주원 후손들의 반란과 이어지는 흉년으로 인한 도적떼들이 곳곳에 출몰하는 등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웠다. 특히 왜구들의 노략질과 중국으로 이어지는 뱃길을 가로막는 해상도적들의 횡포가 심해 백성들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이때 당나라에서 돌아와 해상무역을 하던 장보고가 흥덕왕을 찾아와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장보고의 우락부락한 성품에 위협을 느낀 흥덕왕은 1만 명의 군사를 모집할 권한을 부여하고, 장보고를 해상을 지키는 군대의 수장으로 명했다. 장보고는 왕의 허락에 엎드려 감사 인사를 올리고, 강력한 군대를 길러 해상왕으로 불리며 신라의 안전한 뱃길을 열었다.



그러나 흥덕왕이 왕위를 물려줄 아들 없이 죽자 치열한 왕위쟁탈전이 벌어져 신라는 크게 기울기 시작했다.



원성왕의 셋째 아들 예영의 손자 제륭이 숙부인 김균정과 왕위를 두고 죽고 죽이는 전쟁을 벌였다. 당시 상대등이었던 균정은 아들 김우징과 김양이 아찬이었던 예징과 양순 등을 세력으로 규합해 제륭의 세력에 맞섰다.





▲ 삼촌인 언승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한 소성왕을 기리기 위해 왕비가 무장산 자락에 조성한 무장사지의 삼층석탑.
▲ 삼촌인 언승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한 소성왕을 기리기 위해 왕비가 무장산 자락에 조성한 무장사지의 삼층석탑.


제륭은 당시 시중이었던 처남 김명과 아찬 이홍, 배훤백 등을 지지세력으로 두고 전쟁에 나서 균정을 죽이고 승리해 43대 희강왕으로 즉위했다.



우징은 적판궁의 싸움에서 아버지 균정을 잃고, 도망쳐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때 김양도 산속으로 도망쳐 세력을 모아 복수를 도모하다가 청해진으로 달려와 우징과 합류했다.



왕위 쟁탈전의 공을 인정받아 상대등의 직위에 오른 김명은 다시 시중 이홍 등과 결탁해 희강왕을 죽이고 44대 민애왕으로 등극했다. 희강왕은 왕위에 오른지 3년이 되던 해에 믿었던 처남이 군사들을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자 가망이 없음을 깨닫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 원성왕의 증손자로 흥덕왕의 동생인 충공의 아들 민애왕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민애왕은 처남남매간인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1년 만에 김우징을 앞세운 김양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 원성왕의 증손자로 흥덕왕의 동생인 충공의 아들 민애왕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민애왕은 처남남매간인 희강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1년 만에 김우징을 앞세운 김양의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


배반의 왕인 민애왕도 목숨이 길지 않았다. 청해진에 피신해 있던 김양은 장보고에게 “왕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된 파렴치한 김명을 둬서는 안된다”며 서울로 진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보고는 “나는 흥덕왕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군사를 이끌고 서울로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고 말하며 자신은 청해진에 남았다. 대신 우징이 “내가 왕이 되면 장군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고 하자 이를 믿고 5천 명의 군사를 빌려줬다.



우징은 김양을 앞세워 서울로 단숨에 달려가 나약해진 왕궁을 무너뜨렸다. 민애왕도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칼에 맞아 숨졌다.



우징은 아버지의 복수에 성공하면서 45대 신무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신무왕은 전쟁 중에 당한 부상 등으로 왕위에 오른 지 3개월 만에 죽으면서 신라 1천 년의 역사 중에 가장 단명한 왕으로 기록에 남았다.



신무왕의 죽음으로 아들 경응이 46대 문성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 하대의 내전은 조용하게 진정되는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장보고가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겠다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궁궐로 쳐들어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궁궐은 불안에 잠겼다. 염장 장군이 꾀를 내어 장보고에게 거짓 의탁했다가 기회를 보아 장보고의 목을 베면서 혼란은 일단락됐다.



문성왕의 태자가 사망하자 왕은 왕위를 삼촌 의정에게 넘긴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47대 헌안왕이 된 의정은 신무왕의 이복 동생이다.





*삼국유사 기행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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