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지왕 고구려 사신의 도움으로 실성왕 제거해 왕위에 올라

▲ 경주 대릉원에 가장 큰 쌍분으로 우뚝 솟은 황남대총. 내물왕 또는 실성왕, 눌지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 경주 대릉원에 가장 큰 쌍분으로 우뚝 솟은 황남대총. 내물왕 또는 실성왕, 눌지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간은 어쩌면 권력의 노예가 아닐까 싶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향한 몸부림은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주변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걸고 도전하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권력을 잡기 위한 욕심이 사람을 권력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싶다.



신라 18대 실성왕과 19대 눌지왕의 왕권을 빼앗고 유지하려는 노력들을 보면 권력에 대한 다툼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된다.



실성왕은 내물왕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고구려의 힘을 빌어 왕위에 오른 다음 내물왕의 아들들을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내 복수를 감행했다.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다.



실성왕은 이어 고구려 사신들에게 청원해 내물왕의 큰 아들인 눌지를 죽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오히려 눌지에게 실성왕이 죽임을 당하고 눌지가 왕으로 등극한다.



▲ 황남대총 내부에서 들어 난 시신의 주곽. 남북으로 이어진 두 기의 곽에서 금관과 금동관이 나왔다.
▲ 황남대총 내부에서 들어 난 시신의 주곽. 남북으로 이어진 두 기의 곽에서 금관과 금동관이 나왔다.


◆실성왕과 눌지왕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기록은 많은 왕의 죽음과 왕권 이양 과정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고 있는데 비해 실성왕과 눌지왕의 왕위계승과 죽음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실성왕: 신라 제18대 실성왕은 402년에 왕위에 올라 417년까지 1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김알지의 후손으로 이찬 대서지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아간 석등보의 딸인 이리부인이다. 왕비는 미추왕의 딸 아류부인이다. 왕은 신장이 7척5촌으로 매우 컸으며 명민하고 지혜로웠다.



삼국사기는 내물왕이 죽은 뒤 아들들의 나이가 어려 화백회의에서 실성을 추대해 왕위를 계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실성이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내물왕을 원망했고, 그가 401년 고구려로부터 귀국한 다음해에 내물왕이 죽자 왕자들을 제쳐 놓고 즉위한 점으로 미뤄 그의 왕위 계승에는 고구려의 군사적 후원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성왕은 403년에 효과적으로 국가를 통치하고자 미사품을 서불한으로 삼고 군국의 일들을 위임했다. 외교적으로는 왜와의 화해를 위해서 402년에 내물왕의 왕자인 미사흔을 볼모로 보내고, 412년에는 고구려와 우호적으로 지내기 위해 내물왕의 왕자 복호를 볼모로 보내기도 했다.



▲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들. 큰 항아리와 말 장신구, 토기, 무기류 등이 다양하게 나왔다.
▲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들. 큰 항아리와 말 장신구, 토기, 무기류 등이 다양하게 나왔다.


실성왕의 인질외교는 왜와 고구려 양국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대외적인 명분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내물왕의 왕자들을 외국에 볼모로 보냄으로써 내물 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던 내물왕에 복수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또 실성 왕계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와는 관계 개선을 위한 외교적 노력 이외에 405년에는 왕이 친히 기병을 이끌고 명활성에 침입해 온 왜병을 맞아 싸워서 300여 명을 참획하는 군사적 응징도 가했다.



실성왕은 내물왕의 태자인 눌지가 덕망이 높아 자신의 왕권을 위협하자 고구려의 힘을 이용해 눌지를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고구려는 눌지를 지원해 정변을 일으켜서 실성왕은 살해됐다.



이 정변으로 실성왕의 모계인 석씨세력은 김씨계에 의해 철저히 타도돼 소멸됐다. 실성왕에 뒤이어 내물왕계인 눌지왕이 즉위했다.



407년 왜인들이 동쪽 변방에 침입해 백성 100여 명을 약탈해갔다. 408년에는 왜인들이 대마도에 군영을 설치하고 병기구와 군량을 저축하며 신라를 습격하려고 도모한다는 말을 듣고, 적들이 쳐들어오기 전에 먼저 정병을 뽑아 적들의 군비를 격파하자고 했다.





▲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큰 칼.
▲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큰 칼.


이때 서불한 미사품이 “군사는 흉기이고 싸움은 위험한 일이라 항차 큰 바다를 건너서 왜인을 정벌하다가 만일에 승리하지 못하면 후퇴하기도 어려워 오히려 위험에 빠집니다”라며 만류하자 왕은 대마도 수복계획을 포기했다.



413년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누각과 같이 보이고 향기가 매우 성하게 퍼지며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았다.

왕은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신령이 내려와서 노는 것으로 그곳은 응당 복지일 것이다”고 말했다. 그 뒤부터 누구도 그곳에서 나무를 베지 않도록 금했다.



415년 실성왕은 경주 부근에 있는 혈성원에서 군사를 크게 검열하고 금성의 남문에 나가 군사들의 활쏘기를 관람했다. 8월에 왜인들과 풍도에서 싸워 이를 격파하고 승리했다.



416년 동쪽 해변에서 고기를 잡았는데 뿔이 있고 그 크기가 수레에 가득할 정도였다. 5월에 토함산이 무너지고 샘물이 세길이나 높이 솟아 올랐다. 417년 5월에 실성왕이 돌아가셨다.

▲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다양한 장신구로 꾸며진 허리띠.
▲ 황남대총에서 발굴된 다양한 장신구로 꾸며진 허리띠.


▶눌지왕: 신라 제19대 눌지왕은 417년 왕위에 올라 458년까지 41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눌지왕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내물왕이고 어머니는 미추왕의 딸 보반 부인이며 부인은 실성왕의 딸이다.



내물왕이 392년 실성을 고구려로 볼모로 보냈다. 실성은 401년 귀국해 내물왕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실성왕은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이 외국으로 볼모로 보내진 것에 대해 내물왕의 아들 눌지를 해쳐 복수하려고 했다.



실성은 고구려에 볼모로 있을 때 가까이 지냈던 대신을 불러 “눌지를 보내 그대를 맞이하게 할터이니 눌지를 죽여주시오”라고 당부했다.



이어 실성은 눌지를 고구려 사신을 맞이하도록 했다. 그러나 눌지를 만난 고구려 사신은 “그대의 국왕이 그대를 죽이라고 했는데 지금 그대를 보니 실로 죽이지 못하겠다”고 말하고는 돌아가 버렸다.



▲ 실성왕 당시 낭산이 구름으로 뒤덮이자 신성한 땅이라 여겨 왕명으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낭산의 황복사지 삼층석탑.
▲ 실성왕 당시 낭산이 구름으로 뒤덮이자 신성한 땅이라 여겨 왕명으로 나무를 베지 못하게 했다. 낭산의 황복사지 삼층석탑.


눌지는 이후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실성왕이 고구려의 힘을 빌어 왕위에 올랐지만 눌지왕 역시 고구려의 영향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눌지왕은 왕위에 오른 이후 신라에 대한 고구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418년에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동생 복호를 고구려에서 탈출시켰다. 이어 왜와의 교류를 위해 실성이사금 때 볼모로 보내졌던 동생 미사흔도 귀국시켰다.



고구려와는 424년에 사신을 보내어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433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왕은 나제동맹에 입각해 군사를 파견, 백제를 지원하기도 했다.



미사흔을 귀국시킨 뒤 왜가 431년, 440년, 444년 등 여러차례에 걸쳐 신라를 침범하자 이를 모두 막아냈다. 그리고 450년에는 신라의 하슬라 성주 삼직이 고구려의 변장을 살해해 고구려가 침범하자 외교적인 사과로 해결했다.



이와 같이 불안한 대외적인 위기 속에서 왕실 내부의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해 왕위 계승의 부자 상속제를 확립시켰다. 이 때문에 직계인 자비마립간과 소지마립간은 혼란 없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중앙정청인 남당에서 왕이 직접 노인들을 봉양함으로써 민심을 수습했고, 저수지인 시제를 축조해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모했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우차의 사용법을 가르쳐서 화물 유통을 쉽게 했다.



444년 왜병이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하고 10일 동안 있다가 양식이 떨어지자 퇴각했다. 이때 왕은 군사를 내어 적을 추격하려 했지만 군신들이 말렸다. 그러나 왕은 듣지 아니하고 친히 기병 수천을 거느리고 적을 쫓아가서 독산(현 신광) 동쪽에서 싸웠으나 적에게 패해 장병 절반을 잃었다.



왕은 급히 산으로 피했지만 적들이 왕을 겹겹이 포위했다. 이때 갑자기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자 적들은 이는 하늘의 도움이라 하고 군사들을 거둬 돌아갔다.



458년 2월에 지진이 일어나고 금성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지더니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 신라 실성왕과 눌지왕 때 왜구들이 침범하자 방어했던 명활산성.
▲ 신라 실성왕과 눌지왕 때 왜구들이 침범하자 방어했던 명활산성.




◆스토리텔링: 왕가의 복수

내물왕 이후 실성왕과 눌지왕은 서로 죽이고 죽는 복수극으로 왕권을 획득하고, 죽음에 내몰리는 운명에 처했다.



실성은 왕손이자 아버지의 권력에 힘입어 궁중에서도 칼을 차고 거침없이 행동했다. 내물왕은 실성의 거침없는 행동을 제지하기 위해 고구려에 인질로 보내버렸다.



실성은 고구려에서 눈칫밥을 먹으면서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10년의 볼모 끝에 신라로 돌아온 실성은 뇌물로 사귄 고구려 장군들의 힘을 빌어 늙은 내물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실성왕은 왕위에 오르면서 가장 먼저 내물왕 계열의 실력자들을 하나 둘 제거하고, 자신의 세력으로 왕권을 강화하는데 치중했다.

▲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잔. 당시에도 신라는 바다를 건너 문화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 황남대총에서 나온 유리잔. 당시에도 신라는 바다를 건너 문화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실성왕은 내물왕계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복수하기 위해 내물왕의 아들 복호와 미사흔을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눈에 가시처럼 보이는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 장군도 고구려 사신을 이용해 죽이려고 계책을 꾸몄다.



그러나 눌지의 인품에 감탄한 고구려 사신은 실성왕이 눌지를 제거하려 한다는 계략을 눌지에게 알려줬다.



눌지는 고구려 사신이 돌아가기로 한 전날 자신의 심복 아삼에게 밀명을 내렸다. 아삼은 삼경에 이르는 시간에 급히 말을 몰아 왕궁으로 달려가 실성왕에게 거짓으로 아뢰었다. “폐하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고구려 사신이 우리 눌지 장군을 죽였습니다.”



실성왕은 통쾌하게 웃으면서 “눌지가 거만하게 굴더니 드디어 벌을 받았구나”라며 “대신회의를 소집하고 고구려 사신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했다.



변복을 하고 아삼과 함께 달려왔던 눌지는 실성왕의 진의를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실성왕의 목을 베었다.



곧이어 달려온 눌지의 군사들, 고구려 사신의 병사들이 실성왕계의 실력자들을 제압해 정리하고, 눌지는 바로 왕위에 올랐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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