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넘는 역사로 가장 오래돼, 현 제일교회 인근에서 터 잡으며 시작||교정에 우뚝 선

▲ 종로초 교포
▲ 종로초 교포
▲ 현 제일교회 전경
▲ 현 제일교회 전경
대구종로초등학교는 1900년 11월11일 현 제일교회 인근 초가집에서 터를 잡으며 시작된 학교다.

올해로 1만8천670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12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학교이다.

특히 교정에 우뚝 서 있는 ‘최제우 나무’라고 불리는 회화나무는 수령 400년이 넘은 노거수다.

현재 보호수로 지정돼 아름다운 수형과 푸른 기상을 뽐내며 학생들이 배우고 자라는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 종로초등학교의 자부심과 같다.

▲ 종로초교의 설립자 겸 초대 목사 아담스(안의와 교장)
▲ 종로초교의 설립자 겸 초대 목사 아담스(안의와 교장)
◆종로초의 시작은 ‘선교사’

대구종로초등학교의 개교는 대구에 기독교가 들어온 과정과 연관된다.

대구에 최초로 기독교가 들어온 것은 1893년(고종 30년) 북장로 선교사 베어드 목사 때부터다. 그의 손아래 처남인 아담스 목사는 1897년 11월1일 대구에 와서 대구제일교회의 설립자 겸 초대 목사가 됐다.

아담스 목사는 한국인에게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이름을 안의와(安義窩)로 지어 불렀다.

1900년 11월11일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 구내 초가집에서 대남학교(大男學校, 남자부)를 개교해 초대 교장이 됐다.

당시 공식 명칭은 사립 대남학교 또는 야소교 대남소학교였으나 앞에 글자는 빼고 간단히 대남학교라 불렀다.

종로초교는 아담스 목사가 설립한 대구 최초의 사립초등학교로 대구에서 설립된 근대교육의 효시로서의 의의가 크다.

1899년 10월26일 부루언(부해리, 傅海利) 목사가 대구에 와 복음 선교활동을 하면서 2대 제일교회 목사가 됐다.

그의 부인 부마태와 교육 분야에 헌신할 것을 부부가 약속하고 부인 부마태가 2년간 한국어 습득에 노력을 했으며, 제일 교회 구내 신명소학교(여자부)를 설립했다.

부마태 교장은 55세 일기로 이국땅에서 잠들었으며 현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내 선교사 묘지에 잠들어 있다.

1914년 5월10일자로 대남학교는 희원학교(喜援學校), 신명학교는 순도학교(順道學校)로 이름이 변경됐다.

이는 학교 증축을 위해 기부한 서희원, 박순도 두 여사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따서 교명을 변경한 것이다.

▲ 1922년 현 희도맨션에 신축 이전된 교사의 모습.
▲ 1922년 현 희도맨션에 신축 이전된 교사의 모습.
1926년 4월1일에는 두 학교를 합하는데 남자부의 희원(喜瑗)의 ‘희’와 여자부의 순도(順道)의 ‘도’를 합해 희도보통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그 후 1941년 일본의 초등학교(황국신민학교) 정책에 따라 희도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1955년 종로국민학교로 개칭됐다가 1996년 3월1일 자로 전국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일제히 변경됨에 따라 대구종로초등학교로 개칭돼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1926년 희원학교로 불렸던 당시 종로초교 제2회 졸업사진.
▲ 1926년 희원학교로 불렸던 당시 종로초교 제2회 졸업사진.
◆종로초의 역사 변천사

종로초교는 120년이 넘는 역사 동안 이사를 3번 했다.

우선 대구제일교회 구내에서 1900년 11월부터 22년을 머물렀으며, 현 희도맨션 자리에 1922년 1월 이사해 32년간 유지했다. 현 위치에는 1954년 10월 이사해 현재에 이른다.

제일교회 구내에서는 학교가 협소해 이전의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었다.

그즈음 서희원, 김울산, 김의균, 이주열 그 외 신도들의 헌금을 합해 4만 원의 성금으로 대구부 수정 100번지(현 희도맨션)에 730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 1922년 11월11일에 준공 및 두 소학교(희원, 순도)를 이전했다. 이전한 새 교사에서 1926년 4월1일에 희도학교가 탄생했다.

1954년 일제 강점기 본정소학교 자리(현 제일교회)로 교사를 옮기고, 1955년 교명도 ‘희도’라는 이름에서 ‘종로’라는 이름으로 바꾸게 됐다.

참고로 희도학교가 해방이 되기 전 현 자리에는 일본인이 입학대상이었던 일본 본정(本町)소학교(1918년 개교~1945년 폐교)가 있었다.

해방과 동시에 일본인 전용 학교인 본정소학교는 폐교되고 일본 학생들은 본국으로 귀국하게 됐다.

그 자리는 해방과 동시에 미군정청이 3년간 주둔했고, 대구지방법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 대구농과대학(현 경북대학교 농대)이 개교되기도 했다.

▲ 1954년 건물 인수 당시 일본 본정소학교 전경
▲ 1954년 건물 인수 당시 일본 본정소학교 전경
종로초는 일본 본정소학교와는 무관하며, 다만 그 건물만 인수했을 뿐이다.

이 본정소학교 자리는 구한말 조선인이 다녔던 달본소학교 자리였기에 일본인에 빼앗기었던 것을 해방 후 되찾은 것이다.

학교 공간 협소로 인해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희도학교를 관련한 많은 자료는 사라졌고, 학교 이전 관련 서류만 남아있다.

종로초교는 1912년 대남학교로 불리던 시절 교원 수는 3명, 학생 수는 76명이었다.

신명여학교는 교원 수 3명, 학생 수 52명이었고 1914년 희원학교는 남자 108명, 순도학교는 67명의 재적수를 기록하고 있다.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영어나 근대교육 일변도가 아니었다. 기독계 학교 목표가 조선인 선교를 위한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어서 한자, 한글이 필요했고 선교사 스스로 한글을 배웠다.

학교 교육에서도 중등에서도 초창기에 영어가 아니라 한자, 한글 교육이 실시됐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정책을 펼치면서 사립학교 규칙을 다소 완화해 성경 과목을 가르치는 것이 허용됐으며 일제 강점 후 기독교 학교 역시 총독부의 보통학교로 지정되면서 희도학교도 보통학교의 규정을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적인 교과목은 수신, 국어(일본어), 조선어, 산수, 국사, 지리, 이과, 직업, 도화, 창가, 체조, 가사였다.

그중에서 조선어는 선택과목이었거나 1943년부터는 과목이 폐지된 경우가 있었다.

희도학교는 남겨진 교과서가 없어 정확한 학습 내용 파악은 어렵지만 남성 위주 유교 중심사회의 조선에 여성 교육을 실시했다.

또 종래 유교경전 위주의 공부에서 벗어나 노작 등을 실시함으로써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는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희도학교는 기독교계 학교가 조선인 자제의 반봉건적인 의식 확산에 기여했다는 사례가 되고 있다.

▲ 1979년 대구종로국민학교 당시 정문 모습.
▲ 1979년 대구종로국민학교 당시 정문 모습.
◆종로초의 우수한 업적

희도학교 졸업자 중에서 박태준, 박태원, 김문보, 현제명 등은 음악가로 유명하다.

작곡가 박태준의 ‘동무생각’은 당시 나라 잃은 슬픔, 노래 속의 동무 뜻은 소꿉장난하던 동무이며, 멀리 타향에서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우국지사들을 뜻한다.

또 작곡한 ‘오빠생각’은 일제 식민지하의 농촌 모습을 은연중에 반영하고 있다.

그의 형 박태원은 대구제일교회에서 혼성합창단을 조직했으며 우리가 잘 아는 ‘캔터키 옛집’을 번역하고, ‘클레멘타인’을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아름다운 가사로 번안했다.

‘고향생각', ‘희망의 나라로' 등을 작곡한 현제명도 졸업생이다.

대구 최초의 병원도 선교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희도학교 출신 졸업생이 의사가 많은 것도 서양 의술이 대구에 일찍 보급된 것도 한 이유로 볼 수 있다.

수도 의대학장을 역임한 김희준, 인제의원장이었던 손인식, 이형준, 강진무 등이 희도학교 출신 의사들이었다.

신문물의 도입으로 기존과 다른 근대음악과 체육 영역을 개척한 것이 북미장로회 기독교 학교의 의의였고 그중에 경북지역에 많은 인재를 배출한 곳이 희도학교였다.

▲ 2022년 대구종로초교의 전경.
▲ 2022년 대구종로초교의 전경.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종로초교의 자랑거리도 많다.

종로초의 교목은 교정에 400년 된 회화나무다. 오랜 세월의 역사를 간직한 채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옛날 경상감영 감옥 터로 동학의 교조 수운 최제우(崔濟愚)가 민심을 혼란케 한다는 죄목으로 대구 감영에서 억울한 옥살이와 고문을 받다가 관덕정 뜰(아미산)에서 참형을 당했는데, 후대 사람들이 이것을 지켜봤을 거라 여겨 ‘최제우 나무’로 불리고 있다.

현재 대구 중구 근대골목투어 1코스 경상감영달성길 중 하나로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지나가는 곳이다.

또 종로초교의 상징인 ‘종’이다. 종로초교 교포에도 종 모양이 있는데, 이는 옛 종로 네거리에 설치해 시각을 알려주는 종의 모양을 상징한다.

‘ㅈ’모양의 테는 길을 뜻하며 종소리의 소리 결을 상징하고 있다.

현재 현관 우측에는 1956년 4월에 구입한 큰 종을 1971년 11월에 종각을 건립해 지금도 운동회와 개교기념일 날 타종식을 거행하며 옛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 외에도 반공소년 이승복 상, 화랑의 상, 새마을정신 상, 해태상 등 다른 학교에 없는 많은 기념상이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 강혜경 대구종로초등학교 교장이 “저마다 제 빛깔의 꿈과 희망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 강혜경 대구종로초등학교 교장이 “저마다 제 빛깔의 꿈과 희망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강혜경 대구종로초등학교 교장

“종로의 행복 리더들이 푸른 회화나무 아래서 미래사회의 주역으로서 역량을 키워 서로 소통하고 공감하며 저마다 제 빛깔의 꿈과 희망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강혜경 대구종로초등학교 교장이 이같이 밝혔다.

종로초등학교는 2013년 협력과 배움으로 꿈을 가꾸는 대구교육청 지정 ‘행복학교’로 지정돼 현재 9년 차 대구 미래학교(행복학교·자율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매 학년 초 두뇌 사고 기반 역량평가를 시행해 그 결과를 바탕으로 4개의 유형별로 드림 파트너를 조직하고, 두뇌 사고 유형과 관련된 맞춤형 진로 체험을 통해 학생들이 꿈을 펼쳐 나가고 미래를 개척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또 미래학교를 운영하며 진로교육과 더불어 SW·AI 교육에 집중함으로써 미래사회 주역으로서 필요한 역량을 키워나가고 있다.

지금은 전교생 100명의 소규모 학교다. 인근에는 중구의 도심재생사업과 학교주변 재건축·재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강 교장은 “미래형 학교 구축 사업인 ‘그린스마트 미래학교’에 선정돼 재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며 “2023년 완공 예정인 강당 신축과 노후화된 본관 개축을 통해 향후 40~50학급 이상으로 늘어날 학교 규모에 맞춰 학생 맞춤형 교육과정 및 교수학습 혁신을 위한 대단지 디지털 친환경 기반의 첨단학교로 거듭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이어 “학생 한 명 한 명이 끼와 재능을 살려 행복한 삶을 가꾸어 나갈 수 있도록 미래지향적 교육과정 운영과 연구 실천하는 학교 문화 정착을 위해 지속해서 노력할 것이다”면서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라는 자부심과 명예를 가지고 앞으로도 오랜 역사를 이어갈 미래 학교로 도약하겠다”고 덧붙였다.



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