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충신 박제상, 고구려에서 보해를, 왜에서 미해 구한 후 극형에 처해져

▲ 울산 두동면 치술령에 박제상 부인과 두 딸이 왜로 간 제상을 기다리다 바위가 됐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는 바위 망부석.
▲ 울산 두동면 치술령에 박제상 부인과 두 딸이 왜로 간 제상을 기다리다 바위가 됐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는 바위 망부석.


박제상은 신라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대신으로 활동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그러나 박제상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의 대표적인 역사 기록물에서도 각각 다르게 기록된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차이는 삼국사기는 박제상, 삼국유사는 김제상이라 해 성이 다르고, 내물왕의 둘째 및 셋째 아들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낸 시기에 대해서도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내물왕이 390년 셋째 아들 미해를 왜국에 보내 볼모가 되게 했고, 눌지왕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째인 419년 동생 보해를 고구려에 보내 볼모가 되게 했다고 각각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실성왕이 내물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내물왕의 아들들을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보냈다고 하며, 아들들의 이름도 다르다.



박제상의 이야기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충절에 대한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또 박제상 부인이 남편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망부석과 은을암에 대한 설화를 통해 열녀의 풍속도로 소개하고 있다.





▲ 박제상 관련 이야기를 영상과 그림 등으로 설명하며 당시 신라시대 상황을 보여 주는 충렬공박제상기념관. 울산 두동면에 위치하고 있다.
▲ 박제상 관련 이야기를 영상과 그림 등으로 설명하며 당시 신라시대 상황을 보여 주는 충렬공박제상기념관. 울산 두동면에 위치하고 있다.




◆기록 속의 박제상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모두 박제상에 대해 논하고 있지만 성씨를 박제상, 김제상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으며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인물사연구원에서 펴낸 신라왕조실록에 나타나는 박제상에 대해 소개한다.



박제상은 생몰미상의 신라시대 충신이다. 내물왕 때부터 눌지왕 때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김제상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박제상은 신라 시조 혁거세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 아버지는 파진찬 물품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세계는 거의 신빙성이 없다.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402년 내물왕의 셋째 아들인 미사흔을 왜에, 412년에는 내물왕의 둘째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파견하면서 고구려에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이는 모두 실성왕 시대의 일이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내물왕의 큰아들 눌지왕은 즉위 후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군신을 불러 협의한 결과 모두 박제상이 그러한 일을 맡을 역량이 있는 적절한 인물이라고 천거했다.





▲ 박제상 부인의 영혼이 새가 되어 숨어있는 곳으로 전해지는 은을암. 울산 범서읍 척과리에 위치해 있다.
▲ 박제상 부인의 영혼이 새가 되어 숨어있는 곳으로 전해지는 은을암. 울산 범서읍 척과리에 위치해 있다.


당시 박제상은 양산지방의 토호세력으로 삽량주간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관리였다. 그는 418년 왕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가서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해 복호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했다. 귀국한 즉시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다.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해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참언하므로 이에 왜가 사병을 파견해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했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와 협력해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왕 앞에 끌려나갔다.



왜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신라에 알려지자 눌지왕은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그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책봉했으며 둘째 딸을 미사흔의 아내로 삼게 했다.



▲ 경주 망덕사지 앞의 벌지지. 고구려에서 돌아와 집에 들르지도 않고 죽음의 땅 왜로 가는 박제상을 만나러 율포항까지 갔던 부인이 벌써 배를 타고 떠나는 모습만 지켜보고 다리를 뻗어 돌아오지 않으려 버텼던 곳.
▲ 경주 망덕사지 앞의 벌지지. 고구려에서 돌아와 집에 들르지도 않고 죽음의 땅 왜로 가는 박제상을 만나러 율포항까지 갔던 부인이 벌써 배를 타고 떠나는 모습만 지켜보고 다리를 뻗어 돌아오지 않으려 버텼던 곳.




◆벌지지와 망부석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왕의 아우 보해를 데리고 무사히 돌아왔다. 왕이 보해를 만나고 보니 미해 생각이 더하여 한편으로는 그지없이 기쁘고 한편으로는 한량없이 슬픈지라 콩알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 몸뚱이에 앞 하나만 달린 것 같고, 한 얼굴에 눈 한쪽만 붙은 것 같구나. 동생 하나는 찾았지만 딴 동생은 앞에 없으니 가슴이 미어지고 찢어지는 듯 하구나”라며 한탄했다.



박제상은 왕의 이야기를 듣고 “왜국에 가서 반드시 왕의 동생을 모시고 오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말을 타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에는 들르지도 않고 바로 율포로 가서 왜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제상의 아내가 이 소문을 듣고 말을 달려 율포에 이르러보니 남편이 탄 배는 이미 닻을 올리고 사공들이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허겁지겁 배를 향해 애타게 불렀지만 눈물에 가린 눈에는 지아비의 흔드는 손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아내는 허탈함에 사랑하는 만큼 원망스럽고 야속해 하며 멍하니 바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뒤쫓아간 친척들에게 이끌리어 정신없이 딸려온 곳이 망덕사 남쪽 모래벌이었다.



“마나님 이제 정신 차리세요. 서라벌에 다 왔심더”라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남편과 거닐던 몰개내 바닥이었고 눈앞 지평선 위에는 지아비가 드나들던 월성이 어른거리고 멀리는 선도산 마루가 하늘에 맞닿아 보이니 남편의 자상하고 늠름한 모습이 사무치게 그립기만 했다.





▲ 박제상기념관에 제상이 고구려에서 복호를 구하고,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있다.
▲ 박제상기념관에 제상이 고구려에서 복호를 구하고,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미사흔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나가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 있다.


‘고구려 땅에 들어간 뒤 하루도 걱정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그보다 더한 왜국으로 떠났으니 대쪽 같은 그의 성미로 보아 왕제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서라벌로 모셔 보내겠지만 자기의 목숨이야 어떻게 될는지, 차라리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쳐 따라가든지 가다가 지쳐서 빠져 죽기라도 했더라면 혼백이라도 그이를 따라갈 것을…’

“나는 안 간다. 아무데도 안 갈란다”고 울부짖으며 모래벌에 길게 누워버렸으니 서라벌 사람들이 뒤에 이곳을 두고 긴 ‘장’, 모래 ‘사’라고 이름 지어 장사라고 불렀다.



누워서 억머구리 같이 슬퍼 우는 부인을 친척 두 사람이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잡아 당겼지만, 그럴수록 더욱 용을 쓰며 모래 땅에 뻗디디는 지라, 또한 이곳 땅의 이름을 벋디디라 했으므로 소리나는 대로 한문을 빌어 ‘벌지지’라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토함산에서 흘러내린 사등이내가 망덕산 문 앞에 와서는 장사 벌지지가 된 것이다.



-설화: 박제상의 부인은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바다 건너 왜국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러다 미사흔(미해)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통곡하다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몸은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변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울산시는 울산 도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 일대 박제상의 유적을 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고, 충렬공박제상기념관을 건립해 관리하고 있다. 울산은 치산서원, 망부석, 은을암을 박제상과 그의 부인에 대한 유적으로 지정·관리하고 있다.





▲ 박제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후손과 유림들이 설립한 치산서원의 충렬묘.
▲ 박제상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후손과 유림들이 설립한 치산서원의 충렬묘.




◆스토리텔링: 박제상의 충절과 벌지지

박제상은 서라벌에서 하급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서라벌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지혜로우며 책임감이 유별나게 강하여 주변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아버지를 따라 궁중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여했다가 그의 특출한 재주가 왕의 눈에 띄어 궁중에서 일을 하게 됐다. 그의 일 처리 솜씨는 어려서부터 뛰어나 어른들도 혀를 내두르며 칭찬했다.



내물왕과 실성왕 당시 신라의 국력은 백제와 고구려에 비해 턱없이 약했고, 왜구들도 수시로 침략해 백성들을 약탈해 갔다. 실성왕은 박제상이 지혜로울 뿐 아니라 무위조차 특출해 왜구들의 침략이 잦은 율포로 보내 백성들을 지키도록 했다. 박제상은 내물왕계여서 내물왕계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실성왕의 인사정책이기도 했다.





▲ 박제상기념관 뒤뜰에 세운 신라충신박제상추모비.
▲ 박제상기념관 뒤뜰에 세운 신라충신박제상추모비.


이미 처자식이 여럿이었던 박제상은 가족들을 서라벌에 두고 홀로 율포로 내려가 나라일을 보면서 사농공상 할 것 없이 두루 백성들을 보살피며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이때 실성왕을 몰아내고 눌지왕이 왕위에 올라 고구려와 왜에 볼모로 억류된 동생들을 구해올 대책을 요구했다. 관리들은 하나같이 율포에 가있는 박제상을 추천했다. 박제상은 왕의 명을 받들어 먼저 고구려에 가서 보해를 구해왔다.





▲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1991년 복원한 치산서원.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와 부인을 모신 신모사, 두 딸을 모신 쌍정려의 3개 사당이 있다.
▲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됐다가 1991년 복원한 치산서원. 박제상을 모신 충렬묘와 부인을 모신 신모사, 두 딸을 모신 쌍정려의 3개 사당이 있다.




이어 왜에 볼모로 잡혀있는 미해를 구하기 위해 율포에 재임하면서 눈 여겨 봤던 뱃길에 능하며 눈치가 빠른 강구려를 대동해 왜로 뱃길을 재촉했다.



고구려에 다녀온 이후 집에도 들르지 않고 왕명을 받아 바로 왜로 출발했다는 박제상의 소식을 들은 그의 아내는 허겁지겁 율포로 달려갔다. 그러나 제상의 배는 이미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을 짐작한 제상의 부인은 통곡으로 남편을 전송했다. 남편을 멀리 바다 건너 왜로 떠나보내고 제상의 부인은 울다 그만 혼절했다. 친지들의 부추김을 받아 돌아오는 도중 눈을 뜨니 남편과 거닐던 서라벌의 남천이 눈앞에 넘실거렸다.



다시 혼자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박제상의 아내는 다리를 뻗어 망덕사지 앞 남천의 모래뻘에 발을 묻었다. 이후 사람들은 이곳을 벌지지라 부르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박제상의 아내는 세간을 정리해 딸들과 율포로 갔다. 매일 치술령에 올라 남편이 떠나간 바다를 바라보며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러나 달포가 지나 부인에게 들려온 소식은 박제상이 왜왕에게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부음이었다. 제상의 부인은 그 자리에서 넉을 놓고 울다 울다 죽어 망부석이 됐다.



눌지왕은 박제상의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추서하고, 제상의 남은 딸을 미해의 아내로 맞이했다.



울산시는 치술령과 은을암, 치산서원 등의 유적이 있는 곳에 신라충신박제상기념비를 세우고 박제상기념관을 설립해 그의 정신을 기리며 역사문화의 산교육장으로 운영하고 있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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