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물왕 이후 맏아들이 왕좌 세습, 소지왕 벽화에 빠져 세습제 붕괴

▲ 신라 천년의 궁성으로 자리잡았던 월성은 파사왕이 처음 쌓은 이후 자비왕 때 다시 보강공사를 거쳐 소지왕 때에 완공했다. 월성 남쪽의 산책로.
▲ 신라 천년의 궁성으로 자리잡았던 월성은 파사왕이 처음 쌓은 이후 자비왕 때 다시 보강공사를 거쳐 소지왕 때에 완공했다. 월성 남쪽의 산책로.




자비왕과 소지왕은 내물왕에 이은 눌지왕의 강력한 통치력에 의한 중앙집권적 왕권강화에서 비롯된 세습제로 왕위를 이었다. 내물왕은 46년, 눌지왕 또한 41년의 긴 세월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김씨세력이 안정적으로 왕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내물왕계 인물 중심의 인사정책 등으로 왕권을 탄탄하게 다졌다.



특히 자비왕은 아버지 눌지왕이 세 번째 왕비로 맞이하게 한 미사흔의 딸과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해 소지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자비왕과 소지왕 때에도 여전히 신라의 국력은 백제와 왜, 고구려에 비해 크게 뛰어나지 않아 끊임없는 침략전쟁을 겪어야 했다.



자비왕은 튼튼한 국방을 위해 궁궐이 있는 월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기 시작했다. 월성을 수리하는 동안 명활산성으로 궁궐을 옮겨 그 이후 명활성으로 부르기도 한다. 소지왕 때에 월성 보강공사를 마무리하고 천년의 궁성 월성으로 복귀했다.



소지왕은 짧은 평화시기를 맞아 벽화라는 여인에 빠져 국정에 나태함을 보이며 어지러운 내정으로 혼란을 초래했다. 결국 소지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이어주지 못하고, 4촌이었던 지증왕이 64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 월성 남쪽은 남천이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천연해자 기능을 했다. 남천으로 이어지는 월성의 성벽과 문지.
▲ 월성 남쪽은 남천이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며 천연해자 기능을 했다. 남천으로 이어지는 월성의 성벽과 문지.




◆자비왕

자비왕은 눌지왕의 맏아들로 신라 제20대 왕이다. 어머니는 실성왕의 딸 김씨이고, 왕비는 기록상 세 명을 두었다. 세 번째 왕비가 내물왕의 아들이었던 미사흔의 딸이다. 삼촌의 딸이므로 사촌간의 혼사인 셈이다.



눌지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에 따라 즉위하여 보다 강화된 왕권을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무엇보다 종래의 족제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6부를 개편했다.



또 469년 왕경인 경주를 지역적으로 구분해 방리명을 확정함으로써 왕경의 족제적 성격을 탈피하고 행정적 성격을 강하게 했다.



국내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대비해 눌지왕 때 체결했던 백제와의 공수동맹을 왕가의 결혼으로 보다 강화했다. 474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자 위기에 처한 백제의 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이에 군사를 파견해 백제를 도왔다.



그러나 신라의 구원병이 백제에 이르기도 전에 백제의 한산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했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을 발굴하고 있는 현장.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월성을 발굴하고 있는 현장.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이 증대되자 자비왕은 백성을 징발하여 삼년산성(지금의 보은), 모로성, 일모성, 사시성, 광석성, 답달성, 구례성, 좌라성 등 일선지대의 요새지에 새로이 산성을 축조했다. 새로운 산성을 쌓아 고구려의 남하에 대한 방비와 아울러 이미 확보한 점령지의 효과적인 통치를 꾀하였다.



고구려에 이어 왜의 침입도 몇 차례나 있었는데 모두 효과적으로 격퇴했다. 한편 왕은 연해지방의 두 곳에 성을 쌓아 왜인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467년에는 전함을 수리하여 수군을 강화하기도 했다.



459년 4월에 왜인들이 병선 1백여 척으로 침입해 동쪽 변방을 습격하고 쳐들어와 월성을 포위하고 공격해왔다. 사방에서 돌과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왕은 군사들을 정비하고 성에서 나가지 않고 수비에 치중했다. 적들이 보급물품이 고갈되면서 퇴주하려 할 때 왕은 군사를 내어 적을 격파하고 북으로 해구까지 추격해 물리쳤다. 적들은 물에 빠져 죽는 자가 반수가 넘었다. 4월에 용이 금성의 우물에 나타났다.

▲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지금의 보은지방에 쌓은 삼년산성(사진은 김상조 문화해설사 제공).
▲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지금의 보은지방에 쌓은 삼년산성(사진은 김상조 문화해설사 제공).


462년 5월에 또 왜인들이 쳐들어와서 활개성을 습격하고 사람 1천 명을 사로잡아 데리고 갔다. 463년 2월에도 왜인들이 삽량성(현 양산)으로 침입하였다가 패하여 물러가는데 왕은 벌지와 덕지에게 명하여 이를 치게 했다. 벌지와 덕지는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요새 주위에 복병을 설치하고 있다가 크게 격파하고 적들은 패주했다.



왕은 왜인들이 번번이 강역으로 침범하므로 연해변에 두 개의 성을 축조하고, 수시로 군사를 검열하며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475년 정월에 왕은 왜군의 잦은 침략에 대비해 월성을 튼튼하게 보수하기로 하고, 명활성으로 이주했다.



478년 10월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자비왕은 월성 보수를 마치지 못하고 479년 2월3일에 죽고, 소지왕이 즉위했다.

▲ 자비왕이 쌓고, 소지왕 때에 보강수리한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복원 모습(사진은 김상조 문화해설사 제공).
▲ 자비왕이 쌓고, 소지왕 때에 보강수리한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복원 모습(사진은 김상조 문화해설사 제공).




◆소지왕

소지왕은 신라 제21대 왕으로 비처왕으로도 불린다. 479년에 즉위해 500년까지 21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성은 김씨이고, 자비왕의 큰아들이라고 하지만 제3왕비인 미사흔의 딸이 어머니로 전한다. 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부인이다. 왕은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했으며 스스로 겸손하고 공손하여 사람들이 모두 감복했다.



487년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도로인 관도를 수리했다. 490년에는 왕경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를 열어 사방의 물류를 유통시켰다. 또 족제적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체제를 개편했다. 이러한 정책은 자비왕 대의 방리명 확정과 아울러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평가된다.



소지왕은 또 비열성(지금의 안변), 일선군(지금의 선산), 날이군(지금의 영주) 등지를 순행하여 병사를 위문하고 재해지나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해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직업 없이 떠도는 백성들을 귀농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왕의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아울러 농업 생산력 증대에 상당히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소지왕 대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지방을 자주 공격했다.

▲ 신라 자비왕이 월성을 보수하기 위해 궁성으로 활용했던 명활산성의 북문지.
▲ 신라 자비왕이 월성을 보수하기 위해 궁성으로 활용했던 명활산성의 북문지.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고, 가야와도 연합하여 모산성(지금의 진천) 전투에서 고구려를 물리쳤다. 특히 493년에 소지왕은 백제 동성왕의 결혼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냄으로써 결혼동맹을 맺었다.



그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공수관계는 더욱 공고해져 494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했을 때는 백제가, 495년 백제를 공격했을 때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했다. 이러한 일련의 고구려와의 전투과정에서 변경지방의 요충지에는 삼년산성(지금의 보은) 등의 성을 개축하거나 증축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다.



480년 10월에 백성들의 기근이 심하자 왕은 곡창을 풀어내어 이를 구제했지만 11월 말갈이 군사를 일으켜 북쪽변경을 침범해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했다.



왕은 487년 2월 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을(경주 나정)에 신궁을 설치했다. 3월에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을 설치했는데 이때 왕은 유사들에게 명하여 도로를 수리하도록 했다. 7월에 월성에 우레가 울렸다.



488년 정월에 왕은 월성으로 이주하고, 490년 처음으로 서울에 시장을 개설하고 사방의 물자가 유통되도록 했다.



493년 3월 백제왕 모대가 사신을 파견하여 혼인을 청하므로 왕은 이벌찬 비지의 딸을 보내어 결혼하게 했다. 7월에 임해진과 장령진을 설치하고 왜적을 방비했다.

▲ 명활산성에서 바라보는 서북쪽.
▲ 명활산성에서 바라보는 서북쪽.


494년 7월에는 장군 실죽 등이 고구려 군사와 살수(현 청천강) 벌판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견아성(현 문경)으로 물러서자 고구려 군사가 이를 포위했다. 이때 백제왕 모대가 군사 3천 명을 파견하여 신라를 돕자 고구려 군사는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495년 정월에 왕은 친히 나을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8월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백제의 치양성(현 원주)으로 쳐들어와 포위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하였다. 왕은 장군 덕지에게 명하여 이를 돕게 해 고구려의 많은 군사를 격파하고 백제를 구원하였으며 이에 백제왕은 사신을 파견해 왕에게 사례했다.



500년 9월에 왕은 날기군(현 영주)으로 행차했다. 날기군의 주민 파로가 미모가 매우 뛰어난 16세 된 딸 벽화를 비단과 수놓은 의복을 입히고 수레에 비단으로 둘러싸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벽화를 돌려보냈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해 남몰래 찾아가 벽화와 동침하곤 했다. 그러다 왕은 벽화를 데려와 별실에 두었는데 벽화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11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 명활산성을 안에서 둘러볼 수 있게 조성한 산책로.
▲ 명활산성을 안에서 둘러볼 수 있게 조성한 산책로.




◆월성과 명활산성

월성은 신라 제5대 파사왕이 처음 궁궐로 사용하면서 신라천년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왕궁으로 세계에서도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긴 역사를 자랑하는 왕궁이 있던 성이다.



자비왕이 왜병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월성에서 버티면서 적을 막아낸 이후 명활산성으로 잠시 궁궐을 옮겨 대대적인 보강공사를 벌였다. 자비왕은 외부에서 월성 내부로 이어지는 수로를 만들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성 안에서 일상생활을 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물자를 수급할 수 있게 했다.



소지왕대까지 이어진 긴 공사기간을 통해 월성은 외부의 어떠한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 완벽한 요새로 탈바꿈했다. 성문을 열지 않고도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 해자와 수로를 통해 진입해 오는 공격을 차단할 수 있는 방어체계를 구축했다.



이후 문무왕은 1당 100의 절정고수 300명으로 구성된 월성을 수호하는 비밀결사대를 아무도 모르게 곳곳에 배치했다. 비밀결사대는 왕에게만 존재가 전해지며, 그들은 또 전수받은 초절정의 무예를 스스로 후계자를 키워 직접 전수하며 조직을 유지했다. 월성이 세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천년의 궁성으로 명맥을 이어온 비법이다.



명활산성은 신라가 국가체제로 기틀을 다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왜병의 공격을 막는 최후의 보루로 쌓아올렸다. 자비왕이 월성을 수리하면서 왕궁으로 선택할 정도로 명활산성도 월성에 가까우면서 튼튼하게 조성된 성이다.



명활산성은 자비왕 이후 명활성으로 불리면서 신라의 중요성으로 관리되어 왔다. 그러나 선덕여왕 당시 상대등이었던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키며 본거지로 삼은 이후 명활성의 기능은 점점 약해졌다. 단지 해안과 북쪽으로부터 월성으로 접근하는 길목에 위치해 월성을 방어하기 위한 기능만은 신라가 멸망하는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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