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로와 손잡은 지대로 왕실 점령, 지증왕으로 등극

▲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은 일제강점기 155호 고분이며, 신라시대 왕족의 무덤으로 확인됐다.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 당시 역사문화를 관광자원화하고자 발굴해 복원된 고분이며 지증왕의 릉으로 추정된다.
▲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은 일제강점기 155호 고분이며, 신라시대 왕족의 무덤으로 확인됐다. 197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 당시 역사문화를 관광자원화하고자 발굴해 복원된 고분이며 지증왕의 릉으로 추정된다.




세계 역사에 놀랄만한 기록으로 남은 신라 1천 년의 역사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모든 기록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숨어있다.

1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신라 또한 예외는 아니다. 신라의 명칭이 정식 국호로 등장하게 된 것은 신라가 국가로의 면모를 갖춘 이후 500년이나 지난 지증왕 때의 일이다.

신라 제22대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자로 64세에 왕위에 올라 14년 동안 집권했다. 지도로, 지대로, 지철로왕이라고도 불렸다.



지증왕은 처음으로 왕호를 왕으로 고쳤고, 국호를 ‘신라’로 변경했다. 덕업일신 망라사방이라는 글에서 따온 말이다.



지증왕은 순장제도를 금지하고, 소로 농사를 짓는 농경법을 실시하면서 농사를 크게 장려해 생산성을 높였다. 석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또 서라벌 동쪽에 시장을 개설하고, 나라의 군현을 정비해 처음으로 군주를 파견해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며 보살폈다.



이사부 장군을 파견해 당시 우산국으로 불리던 울릉도를 복속하도록 하는 등 나라의 영토를 넓히는 일에도 적극 나서는 한편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 국가로서의 기능을 활성화 했다.



▲ 고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천마총 내부 단면을 복원했다.
▲ 고분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천마총 내부 단면을 복원했다.


◆지증왕에 대한 기록



지증왕의 아버지는 습보갈문왕이고, 어머니는 눌지왕의 딸 조생부인이며 왕비는 박씨로 이찬 등흔의 딸 연제부인이다.



지증왕은 몸이 건장했으며 담력이 있었다.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 없이 죽자 6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지증왕 3년에 순장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리고, 지방조직인 주와 군에 명해 농업을 권장하도록 했다. 우경을 시행하도록 하는 일련의 개혁조치를 단행해 농업 생산력 증대의 계기를 마련했다. 벼농사를 확대 보급하면서 수리사업도 활발히 진행했다.





▲ 천마총이라는 고분의 이름이 있게 한 자작나무에 천마도를 그린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 국보로 지정됐다.
▲ 천마총이라는 고분의 이름이 있게 한 자작나무에 천마도를 그린 백화수피제 천마도 말다래. 국보로 지정됐다.


지증왕은 우경이 시작되던 해에 순장을 금지시켰다. 이는 불교적인 의미도 없지 않으나 농업 노동력의 확보라는 측면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주목된다. 이러한 사회적 생산력 발달에 기반을 두고 일련의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다.



503년에는 그동안 사라, 사로, 신라 등으로 사용되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했다.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꿨다. 이로써 지증왕은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됐다.



국명으로 정한 ‘신라’는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는 뜻의 ‘덕업일신 망라사방’이라는 말에서 취한 것이다.



국명과 왕호의 한화정책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이 아니라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요청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중국의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 왕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고분 내부의 주곽 모습. 목곽 아래에는 금으로 만든 신발, 내부에는 금제허리띠, 금관 등의 장식이 있고, 주변에는 큰 칼과 토기 등의 유물이 있다.
▲ 왕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고분 내부의 주곽 모습. 목곽 아래에는 금으로 만든 신발, 내부에는 금제허리띠, 금관 등의 장식이 있고, 주변에는 큰 칼과 토기 등의 유물이 있다.


또 505년에는 친히 국내의 주군현을 정했다. 지방제도로 주군제도를 실시한 것은 고구려, 백제, 가야 등의 삼국과 전쟁에서 얻어진 점령지의 통치와 영토확장을 위한 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해 새로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적 차원에서 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에 실직주(지금의 강원도 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를 신라 최초의 군주로 삼은 것도 이러한 지방통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신라의 군주제는 군사적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띠고,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실질적인 중간기구로서 기능하는 외직이었다.



▲ 포항 중성리에서 발견된 신라비. 지증왕 2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백성들의 재물에 대한 판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 포항 중성리에서 발견된 신라비. 지증왕 2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백성들의 재물에 대한 판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군사적으로는 동북방면에 파리성, 미실성, 진덕성, 골화성 등 12개 성을 축조해 대외적인 방비를 튼튼히 하고,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복속시키게 했다. 우산국은 명주(현 강릉)의 바로 동쪽 바다에 있는 섬으로 울릉도라고도 불렀다. 그 지방 사람들은 뱃길이 험한 것을 믿고 굴복하지 않으므로 이찬 이사부를 하슬라주 군주로 삼아 이들을 복속시키게 했다. 512년 6월에 우산국이 항복하고 해마다 토산물을 바치게 됐다.



그리고 남쪽방면으로는 신라가 아직 무력으로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시촌(지금의 함안)에 소경을 설치해 그곳 주민을 행정적으로 회유함으로써 신라의 직할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사전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상복법을 제정하고, 서울에 동시를 설치했으며, 선박의 이용을 권장하는 등 일련의 의례와 민생에 관한 시책을 실시하기도 했다.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에 78세의 나이로 죽었다. 시호는 지증이다.



▲ 지증왕이 순장제를 금지하고 그 이후로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우들.
▲ 지증왕이 순장제를 금지하고 그 이후로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우들.




◆스토리텔링: 64세에 왕위에 오른 지대로

지증왕이 된 지대로의 어머니는 눌지왕의 딸이자 자비왕의 여동생 조생부인이다. 지대로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할 뿐 아니라 지혜롭고 영민해 주변의 시선을 받으며 사랑을 한 몸에 차지했다.



조생부인은 아들의 뛰어난 자질이 오히려 너무나 불안했다. 아버지 눌지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은 오빠 자비왕의 아들 소지가 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죽음을 당할 수도 있을 것으로 걱정했다. 조생부인은 눌지왕이 철저하게 큰아들에게 왕위를 잇고싶어 하는 고집스런 의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생부인은 아버지 눌지왕에게 왕궁과는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는 땅을 마련해 달라고 엎드려 부탁했다. 눌지왕은 사랑스런 딸과 지혜로운 손자를 위해 기꺼이 실력있는 호위무사와 함께 흥해지역의 기름진 땅을 줬다.



흥해지역으로 이사를 온 이후로 지대로는 공부는 물론 무예수업에 더욱 열중했다. 그러면서 인근 지역의 청년들과 교류를 활발하게 해 집안에는 늘 청년들의 겨루기와 술자리로 떠들썩했다.



▲ 신라시대 토기로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하는 조각들이 보인다. 특히 신라금으로 보이는 악기가 새겨져 있어 신라시대의 악기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신라시대 토기로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게 하는 조각들이 보인다. 특히 신라금으로 보이는 악기가 새겨져 있어 신라시대의 악기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대로는 청년들과 함께 군인이 되어 전쟁에도 참여했다. 백제, 고구려와의 싸움터에도 나가 늘 앞자리에서 싸우면서 동료들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며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싸움터에서 우상이 됐다.



지대로의 지혜로운 말솜씨와 모든 청년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붙임성에 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는 특히 전쟁 중이나,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그 지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어울려 정을 나누면서 교분을 쌓았다.



고구려와의 날이군전투에서도 지대로는 혁혁한 전투력을 보여 군사들은 물론 지역 인사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곳 전투에서도 날이군의 유력인사였던 파로와 깊은 정을 나눴다. 아무도 모르게 지대로는 파로와 많은 대화를 한 것이다.



지대로는 파로의 여동생과 혼인을 하고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얼마 후 소지왕이 날이군을 방문했을 때 파로는 지대로의 뜻에 따라 16세 된 어린 딸 벽화를 소지왕에게 선물로 보냈다. 결국 벽화는 소지왕의 왕비가 됐고, 왕궁 내부의 실정들을 낱낱이 아버지 파로와 지대로에게 보고하는 첩자가 됐다.



▲ 천마총에서 발굴된 오키나와산 조개껍질로 만든 야광조개국자. 일본과의 교류를 상징한다.
▲ 천마총에서 발굴된 오키나와산 조개껍질로 만든 야광조개국자. 일본과의 교류를 상징한다.


왕이 벽화를 가까이 하면서 벽화에게서 태기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첫 번째 왕비 선혜부인 측에서는 바짝 긴장했다.



소지왕은 아버지 자비왕과 세 번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로 왕위를 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첫째와 둘째 왕비 세력들도 알게 모르게 왕권을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갈등기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기류는 반란의 조짐을 보이면서 소지왕 측근들을 긴장하게 했다. 그들은 특히 선혜부인 세력을 견제하고 있었지만 벽화부인 세력이 왕궁으로 진입하는 것에도 민감하게 대처했다.



선혜부인 세력들은 매년 정월에 왕이 남산 내을신궁을 방문해 제사를 올리는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기회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고 궁중과 왕의 행차길 도중에 날랜 용병들을 배치시켰다.



그러나 소지왕은 이미 모든 계획을 사전에 알아차리고, 왕궁에서부터 내을신궁까지 변복한 병사들을 곳곳에 심어 뒀다.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선혜부인 측의 세력들은 자신들의 군사력을 믿고 일을 벌였다. 왕과 측근 무사들이 신궁에서 취하도록 술을 권하고는 왕이 월정교를 건널 때 다리 아래와 교각에 숨어있던 용병들이 화살을 날리면서 창과 검으로 일시에 공격했다.



용병들의 공격을 막으려는 군사들도 숨겨두었던 무기를 꺼내 들고 왕을 호위하면서 격돌했다. 월정교에서부터 왕궁으로 이어지는 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왕의 행차를 구경하러 나온 백성들은 혼비백산해 흩어지고, 피를 튀기는 싸움에서 죽어 나딩구는 시신들과 부상병들의 아우성, 무기들의 부딪치는 소리가 서라벌을 가득 메웠다.



두 세력들이 지쳐갈 때 해자와 왕궁, 별궁 등에 매복해 있던 지대로와 파로의 군사들이 순식간에 나타나 깨끗하게 정리해버렸다. 소지왕은 이미 적의 칼에 당한 부상이 깊어 죽음 직전에 이르러 간신히 궁으로 피신해 있었다.



지대로의 군사들은 반란군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왕궁을 둘러싸고, 왕실 내부까지 점령해 외부세력의 접근을 차단했다.



지대로는 소지왕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을 지켜보고, 왕의 뜻이라 발표하고는 64세에 22대 지증왕으로 당당하게 즉위했다. 벽화는 지증왕의 보호로 왕궁에서 생활하다가 법흥왕의 후궁으로 삼엽공주를 낳았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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