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돌담마을(한밤마을)…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

발행일 2022-05-29 10: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군위군 부계면 한밤마을은 신라시대인 950년경 홍란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로 이주하면서 부계 홍씨 일족이 번창하였으며, 고려때까지는 일야 혹은 대야로 불리었으나, 1390년 문과에 오른 홍로라는 선비에 의해 대율로 개칭되었다. 팔공산이 북쪽자락에 위치해 있어 경치가 대단히 수려하고 마을 전체의 집들이 북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마을의 주택은 대부분 전통 한옥 구조로 담장은 돌담으로 경오(1930)년 대홍수로 떠내려 온 돌들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축조방법은 막돌허튼층쌓기로 하부가 넓고 상부가 다소 좁은 형태로 넓은 곳은 1m 이상인 경우도 있다. 김진홍 기자
군위 돌담마을(한밤마을)

영남의 명산인 팔공산 북쪽사면의 산자락에 둘러싸인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우리말로는 한밤마을로 불린다. 이 마을은 정겨운 돌담이 미로처럼 이어져 있어 ‘돌담마을’로 알려져 있다. 분지가 형성된 지질시대부터 이어진 자연환경으로 인하여 ‘육지의 제주도’라 부를 정도로 많은 돌이 마을에 남아있다. 밭이든 마당이든 땅을 파면 돌이 나오기에 그 돌로 자연스럽게 돌담이 조성되었다.

한밤마을은 고려 전기 이래 천 년을 이어온 부림홍씨가 터를 잡으면서 형성된 돌담과 유교문화의 흔적인 고택과 서당 및 서원, 불교문화의 흔적인 석불입상과 삼존석굴 등 다양한 문화재의 향기가 공존하는 유서깊은 민속마을로 요즘 전국에서 방문하는 관광객이 날로 늘어나는 명소이다.

◆한밤마을로 불리는 사연

한밤마을에는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을까. 이 마을의 역사는 군위삼존석굴(국보 109호·속칭 제2석굴암)의 조성시기로 보아 7세기 후반 통일신라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니 천 년이 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 마을에 뿌리내린 부림홍씨는 당나라 때 중국에서 건너온 당홍계열로 원조인 학사공 휘 천하부터 휘 난까지의 윗대는 확인할 길이 없어 학사공 휘 천하를 원조로, 재상공 휘 난을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조에 이르러 재상공 휘 난이 재상벼슬을 역임한 후 부림현에 정착하여 후손들은 이를 관향으로 쓰기 시작했다. 후손들은 2021년 남산리 재궁이 있던 터 350평을 부림홍씨 성지로 조성하고 시조 난의 유허비를 건립하여 조상의 숭덕을 기렸다.

부림홍씨는 홍란 이후에도 기록이 실전되어 고려 중엽 직장을 지낸 휘 좌를 1세조로 하여 족보가 이어진다. 2세는 중랑장을 지낸 양제, 3세는 충숙공 우, 4세는 좌복야를 지낸 서이다. 서는 인단과 인석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둘째 아들인 예빈경을 지낸 5세 인석은 고려말 1300년 전 쯤 상주 함창땅으로 옮겨 살면서 그 후손들은 함창파라 불린다.

부림홍씨 집성촌인 이 마을의 옛 지명이 부림이다. 신라시대는 부림현에 속하였고, 고려 초에는 부계현으로 고려 현종 때 상주에 소속되었고 그 뒤 선산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 때 의흥현에 소속되면서 폐현되었다. 대한제국 때 의흥현으로 부활하였다가 1917년 군위군과 통합되었고, 부림현이 부계현으로 바뀌어 지금의 부계면으로 존속되고 있다. 이런 탓으로 부림홍씨를 부계홍씨로 부르기도 하는데 뿌리가 같은 본향이다.

이 마을에 부림홍씨가 터를 잡은 곳은 현재의 갖골과 양산서원 부근이다. 시조인 홍란과 9세인 경재 홍로는 이 마을의 터를 닦았다. 특히 홍로는 고려를 위해 순절한 문하사인을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포은 정몽주의 문인으로 여말선초 불사이군을 이유로 부친이 계신 이 마을로 낙향하여 27세에 생을 마친 부림 홍씨 중시조이다. 중국의 오류선생으로 불렸던 도연명이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와 국화를 좋아했던 것을 흠모한 그는 이 척박한 마을에 군자의 이상향을 실현하려고 하였는지 몰라도 지금도 다섯 그루 버드나무가 전한다. 또한 백이 숙제가 연상되는 불사이군의 삶의 흔적은 대율리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예컨대 멀뫼, 양산, 양산서원, 척서정 등이 그 표징이다.



이러한 홍로의 우국충정정신은 후손에게 이어진다. 후손 중에 10세 홍귀달(대제학), 11세 홍언충(이조좌랑), 15세 홍여하(통정대부 추증), 23세 홍영수(통정대부) 등 걸출한 인물이 배출됐다. 현재 28세 종손 홍구헌씨가 종택을 지키고 있고 학계에도 홍우흠(영남대), 홍대일(계명대), 홍원식(계명대) 등 많은 학자들이 부림홍문을 빛내고 있다.

◆한밤마을의 경관과 문화재

한밤마을은 팔공산이 감싸고 있는 넒은 분지로 하늘 위의 마을처럼 보이니 무릉도원이 연상되는 곳이다. 마을입구에 들어서면 마치 두 물줄기가 합류하듯이 팔자형의 동문이 나그네를 맞이한다. 팔공산에서 팔자를 취한 이 조형물 꼭대기에는 오리를 올려놓았다. 과거 수해가 잦아 동제를 지낼 때 오리조형물을 두어 수해를 막고자 하였다. 어느 해 대홍수로 92명이 사망한 수해를 입어 마을 동쪽이 쓸려가는 바람에 물길을 돌려막기 위해 호박돌로 1km 가까이 방천을 쌓고 이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이 마을은 오랜 시간 팔공산이 침식되어 이룬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팔공산에서 나온 바위와 돌로 뒤덮인 땅을 일구어 경작지와 주거지를 만들면서 여기에서 나오는 돌로 돌담을 둘렀다. 따라서 마을사람들에게 돌은 땀으로 맺힌 삶의 기억물이다. 이런 돌담이 대율리에만 총 6km가 넘으니 돌담마을로 호칭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마을의 사정과는 다르게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오늘도 천년의 시간을 관조하며 사계절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돌담의 서정을 통해 여운을 얻고 간다.

무엇보다 팔공산은 민족의 영산으로 통일신라 때 8만 암자와 사찰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불교의 성지였다. 그런 연유로 한밤마을 곳곳에는 많은 불교유적과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불교문화 유적으로는 대율리에 군위대율리석불입상, 남산리에 군위삼존석굴·군위삼존석굴석조비로자나불좌상·군위삼존석굴모전석탑, 동산리에 3층석탑·불상대좌 등이 있다.

남산리에 있는 군위삼존석굴은 일명 제2석굴암으로 불린다. 통일신라시대 초 700년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1962년 국보 109호로 지정됐다. 삼존석불의 위치는 현재 양산서원 옆쪽의 바위산이다. 이 산은 파계사 뒷산 북쪽 계곡에 학이 노닌다는 학소대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 경주에 있는 석굴암보다 조성연대가 앞선 이 석굴사원은 불교문화재로도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밖에서 보면 바위 산 한 면을 둥글고 파내고 그 안에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2단의 평면으로 되어있고 천장은 입구보다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갔다. 깊이는 4.3cm, 폭은 3.8cm, 높이가 4.25cm의 굴 전면에는 석축을 쌓아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장소를 조성했고, 안쪽에 턱을 만들었으며, 그 앞으로는 화강암 사각대좌를 놓고 그 위에 본존상을 봉안했다. 본존불은 높이가 288cm이고 머리에 새겨진 수많은 음각의 얕고 가는 선들이 세월의 풍상을 이겨내고 있다. 본존상 좌우의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 협시하고 있는데 거의 같은 양식을 취하고 있다.

대율리 한 가운데 위치한 석불입상은 또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추증되는 이 입상은 돌담마을 가운데 작은 사찰인 대율사 경내에 있으며 1989년 보물 제988호로 지정됐다. 이 불상은 1972년 대율사를 건립하면서 땅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하여 복원했다. 발굴당시 불상 주변에 정면 윗면 외에 ‘ㄷ’자형으로 삼면에 큰 돌로 쌓여 있었는데 안쪽은 반듯한 방형이고 바깥쪽은 잡석으로 에워싼 불감형식을 하고 있었기에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있었으면서도 온전한 입상의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불상의 높이는 265cm, 어깨 폭 84cm의 5등신상으로 광배는 없지만 불신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완전한 형태이다. 오른손은 여원인으로 무릎까지 손이 내려왔고, 왼손은 가슴에 손을 대고 있는 독특한 수인을 하고 있다. 하체와 손이 길어 형태미가 불균형을 이루나 당당한 모습과 조각수법이 9세기 통일신라시대 말의 작품으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유교문화 유적과 유물은 대율리에 군위대율리대청·남천고택·백원첩이 있고, 남산리에 휘찬려사 목판·경재실기 목판·포은 경재 간찰 유묵, 양산서원이 있다.

대율리의 대청은 경북유형문화재 제 262호로 조선 전기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인조10년(1632)에 중창한 학사이다. 효종과 숙종 때 중수하였고 1992년 해체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일설에 대율리는 전 지역이 사찰터였고 이 대청은 대종각 자리였다고 한다. 현재 대율리 전통가옥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큰 건물로 조선 중기 기둥 위 초익공 수법을 엿볼 수 있다. ‘대율동중서당’이란 편액이 이 건물의 용처를 알려준다.

양산서원은 과거 있었던 세덕사를 1786년 사림의 공의에 따라 세웠다. 홍로를 위시한 부림홍씨 오현을 배향하고 있다. 오현은 경재 홍로, 허백정 홍귀달, 우암 홍언충, 목재 홍여하, 수헌 홍택하이다. 경재와 수헌은 부림홍씨 함밤파이고, 허백정과 우암, 목재는 함창파이다. 양산은 서원의 뒷산 이름으로 경재 홍로의 행적이 백이 숙제의 수양산에서의 행적과 유사하며 산 이름까지 비슷하여 양산서원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1649년 현재의 터에 용재서원이 세워졌고, 1711년 율리사를 창건해 제향하다 훼철된 뒤 1783년 세덕사를 창건한 뒤 1786년 양산서원으로 승호하였다. 양산서원, 숭덕사, 일성문 편액글씨는 홍우흠 교수가 썼다. 서원의 위상에 어울리는 격조있는 당당한 글씨이다.

양산서원에 소장된 ‘휘찬려사’ 목판은 19세기 초에 만들어졌다. 경북유형문화재 제251호로 지정됐다. 이 목판은 조선 후기 홍여하가 지은 휘찬려사의 책판이다. 홍여하는 호가 목재, 대사간 호의 아들이다. 휘찬려사는 고려사를 간략하게 정리하고 부분적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마지막 권 47권에서 거란, 일본, 여진전이 들어있어 주목을 받는다. 목판은 총827매이다.

녹음이 짙어가는 계절에 팔공산 산세에 감싸인 한밤마을을 찾아 돌담을 거닐며 불교와 유교문화재까지 덤으로 감상하는 안복을 누려보시길 바란다.

정태수

대구경북서예가협회 이사장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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