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철환 객원논설위원

사형제 위헌 여부가 헌법재판소의 심판대에 올랐다. 사형제 논란, 잊을 만 하면 나오는 식상한 이슈 중 하나다. 종교단체가 사형제 반대 청원을 냈다고 하고 헌법재판관 9명 중 5명이 사형제를 반대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사형제 옹호 세력은 그 쪽 수는 많지만 결집력이 약하고 대체로 파이팅이 없다. 그런 까닭에 사형제 논란이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똑같은 주장을 하는 일에 쉽게 지친다. 안 그래도 바쁜데 일일이 대응하는 일이 귀찮고 짜증 날 법도 하다. 게다가 직접 사형선고를 받을 일도 없을 것이고 가까운 친인척이나 지인이 그런 처지에 놓일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것이다. 사형제 폐지 주장이 나올 때마다 자발적으로 전사로 나서 막을 정도로 그렇게 답답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을 터다. 그렇지만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면 나서야 할 때 나서야 하지 않을까.

사형제 폐지 근거로 흔히 오판가능성과 비가역성을 꼽는다. 판사도 오판할 가능성이 없지 않고, 오판으로 인해 사형을 집행한 경우 원상복귀는 불가능하다. 허나 그것 만으로 사형제가 불필요한 건 아니다. 오판가능성은 사형제의 본질이 아니고 재판 과정의 과제일 뿐이다. 피의자는 3심제를 통해 변론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보장 받는다. 무시해도 좋을 만큼 확률이 낮은 오판가능성을 근거로 사형제를 폐지해야 할 정도로 현 사법체계가 허술하지도 않다.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건가. 판사의 능력이 뛰어난 데다 과학화된 수사기법 추이를 감안하면 오판가능성은 기우에 불과하다.

어떤 논자는 사형제는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없다고 주장한다. 사형제와 범죄율을 단순 연계한다는 것은 맞지 않다. 그러한 주장에 대한 납득할만한 증거도 없지만 사형제의 목적이 범죄예방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해자와 그 가족의 상처를 보듬고 사적인 원한을 대신하는 측면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범죄 처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인과응보의 교훈을 보여줌으로써 심리적 안정감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효과도 간과할 수 없다.

사형제가 그 범죄와 연관된 사람들을 모두 죽이는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유도할 수 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강간이나 강도로 끝날 사건이 살인으로 가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는 논리적 비약이고 탁상공론이다. 인간이 신도 아닌데 다른 생명을 빼앗는 결정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은 타당하다. 인간의 생명은 당연히 존엄하다. 다만 생명의 존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생명을 존중해 주는 것이 전제 돼야 한다. 죽을죄를 지은 자는 생명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형벌의 목적을 범죄 예방과 교화에 둔다고 하지만 응징과 복수라는 원초적 취지를 깊이 숙고해봐야 한다. 흉악범을 극형에 처하는 단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그래도 정의가 살아 있다고 믿는 선량한 사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단순한 원칙이 오히려 명쾌할 수 있다. 무엇이든지 기본과 원론이 중요하다. 사형제 폐지는 이상향이자 탁상공론이다. 범죄자의 인권보다 선남선녀의 인권을 존중한다면 사형제 폐지는 맞지 않다. 1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고 근 30년 동안 사형집행이 없는데 굳이 사형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허무하다. 죽을죄는 있고 사형제는 죄가 없다.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