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경들의 의견을 말해 보라.”

세종이 경연(經筵)이 있을 때마다 말끝마다 하는 말이었다. 경연은 조선 시대에 임금이 학문이나 기술을 강론하고 더불어 신하들과 국정을 협의하던 자리였다. 일종의 어전회의였던 셈이다. 세종은 경연에서의 모든 신하들의 침묵을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경연 때마다 이렇게 말함으로써 지시와 결정에 익숙한 신하들에게 직언을 유도했다.

반면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일으킨 임금인 정조는 “그렇지 않다”거나 “경들이 하는 일이 한탄스럽다”는 말을 자주 사용했다. 정조는 어전회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나가면서 개혁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과도한 발언권’을 견제해 나갔다.

세종과 정조는 여러 번 TV 사극으로도 다뤄질 만큼 조선의 대표적 임금이다. 각각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문예부흥을 일으킨 군주여서다. 조선 초기와 후기를 대표하는 두 임금은 닮은 점도 많았다. 두 임금은 당시의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학문연구기관을 똑같이 세웠다. 세종의 집현전과 정조의 규장각으로 두 임금은 이곳에서 똑같이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 정책의 이론적 기반과 추진력을 얻었다.

하지만 리더십 스타일에서 만큼은 현격한 차이를 보였다. 세종과 정조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온 박현모 세종리더십연구소 소장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세종은 ‘뒤에서 밀어주는’ 소통형 지도자였던 반면 정조는 ‘앞에서 끌어주는’ 설득형 스타일의 지도자였다는 것.

박현모 소장은 이 차이는 두 사람이 처한 정치적 환경 및 성격 등에서 비롯됐다고 했다. 세종의 경우 아버지였던 태종이 걸림돌이 될 만한 공신들과 외척을 모두 제거해준 덕에 개혁을 추진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반면, 정조는 외척이나 정적 뿐 아니라 붕당(朋黨)정치의 대립 속에서 즉위하면서 왕권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앞에서 끌고 가는 리더 일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자신의 즉위를 반대한 신하들을 견제하면서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종은 태종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서 출발했다. 성격도 내향적인 편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었다. 반면 정조는 어려운 정치판에서 출발해서 말이 많고 격정적이었다. “나를 따르라”는 리더십이었던 것. 이런 차이가 어전회의인 경연의 운영방식의 차이로 나타난 것이었다.

리더십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백성을 중심에 놓고 이를 위해 진정으로 노력한 것 또한 두 임금의 공통점이었다. 박현모 소장은 두 임금의 국정 운영의 목표는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정치의 목적으로 삼았고 이를 위해 백성의 소리를 잘 들으려 애썼다.

세종이 조선을 태평성대로 만든 비결은 ‘백성을 위한 고뇌’였다.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내 마음이 지옥이기에 그나마 세상이 평온한 것이다.” 10여 년 전 시청률 20% 이상을 기록하며 방영된 TV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나온 세종의 대사다. 내 마음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현 시대의 정치인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정조 치세어록’(푸르메 펴냄)을 쓴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조선의 상황은 내부갈등, 지역갈등 등으로 곪은 상태였다. 정조는 정치력을 발휘해 갈등을 다독였고, 불거지는 문제엔 희생을 최소화시키며 통합을 이뤄냈다”고 했다. 정조의 통치력 또한 200년이 지난 지금 정치의 모델로 삼을 만하다.

무엇보다 국민의 삶을 외면하고 있는 요즘의 여야정치인들에게 ‘정조 치세어록’에 있는 정조의 말을 들려주고 싶다. “해마다 나 자신을 점검하지만 잘한 일이 한두 가지가 있다고 해도 결국은 공이 과오를 가리지 못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두렵고 떨리지 않겠는가.”

박운석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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