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에녹 원장

SNS를 통한 자기표현이 흔한 시대가 요즘이다. 페이스북,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 수 많은 채널을 통해 우리는 소통을 시작한다. 단순히 글이나 사진이 아니라 실시간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유튜브는 일방이 아닌 쌍방적 소통으로 변하고 있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생각이나 관심 분야를 개진함으로써 조직적 여론형성이 가능해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의 생활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톡’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밴드나 오픈 채팅의 공간은 또 다른 모습으로 자기표현의 장이 되고 있다. 그러한 공간의 역기능을 비판하려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가지는 본성적 ‘외로움’이 왜곡된 형태로 정치 현실에 반영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리는 타인의 사생활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인다. 그것을 ‘훔쳐보기’라는 용어로 인간 내면의 욕망을 일컫기도 한다. 이웃집 가족 구성에서부터 직업과 나이 하물며 부부관계의 내밀한 이야기까지 알고자 한다. 그것은 ‘관찰 예능’이라는 이름으로 방송 미디어로 확장되면서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고 있다. 감정이입을 통해 희로애락을 느끼기에 무슨 문제냐고 반문하겠지만 분명 이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영역을 벗어난 일탈임이 분명하다. 외로움과 소통의 변형된 형태라고 하기엔 지나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바네사 슈와르츠가 쓴 ‘구경꾼의 탄생’은 ‘군중 속에서의 개인’의 의미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보는’ 사람과 ‘보이는’ 사람의 모호한 경계선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이 군중 속에서 가지는 위치는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관찰의 대상이 되는 이중적 지위에 있다는 점이다.

현실 정치의 소통과 훔쳐보기의 모습은 이와 다르지 않다. 여야 할 것 없이 모두 자신은 ‘관찰자’라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상대방의 말실수와 가벼운 실책마저 은밀한 비밀과 불법으로 몰고 간다. 하물며 사생활마저 들추어내어 강성지지층과 공격을 계속한다. ‘익명성의 자유’를 가진 팬덤은 전위대 역할을 자처하며 SNS를 점령한다. ‘훔쳐보기’를 통한 의도된 전략인 것이다. 소통은 또 어떠한가. 정권이 바뀌거나 의석수의 불균형이 생길 때마다 여야의 소통, 국민과의 소통을 부르짖어 왔다. 하지만 늘 소통은 레토릭(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그럴듯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 정치의 후진성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는 악다구니에 지나지 않았다.

흔히 우리는 인간의 이중성을 표리부동이란 의미의 ‘겉과 속’이 다르다고 표현한다. 다시 말해 로마신화 속 두 얼굴의 사나이를 의미하는 ‘야누스’가 인간의 본질적 특성이란 것이다. 이것을 정치인의 자질로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의 부조리’함을 인정하더라도 거짓된 얼굴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실리와 명분’의 균형적 운용이 정치의 기술이다. 현대 정당정치의 특성상 실리가 우선시 될 수밖에 없다. 정권획득이든 우월적 의석확보든 그것은 정당의 최우선적 목표다. 하지만 명분이 없는 실리는 그저 한낱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국민의 여론이 우선시되는 정당성이 획득될 때 비로소 진정한 명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진정한’ 소통은 일방적 설득이 아니라 타협과 상호 간에 형성되는 이해의 산물이 돼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시도하는 도어스테핑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관찰자라는 주체적 입장으로서만 아니라 국민에게 보여지는 관찰의 대상이란 점을 자각해야 한다. SNS라는 방법을 통해 주고받는 자기방어적 변명보단 진정한 모습으로 국민 앞에 서야만 한다. 온라인이 또 하나의 세상이 된 현실에서 ‘익명성의 자유’ 뒤에 숨어있는 ‘위장된 정치’의 사실과 진실을 국민은 알아야만 한다.

김시욱 애녹 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