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이번 여름, 휴가차 경북 영양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을 몇몇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영양을 다녀왔다. 명목은 문학투어였다. 코스 중에 조지훈 문학관과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주실마을도 당연히 포함됐다. 전시관에는 그의 육필원고와 문학잡지인 ‘문장지’ 등이 전시돼 있었다. 문학관에선 이외에도 지훈의 가족 이야기와 선비로서의 그의 삶을 알 수 있는 자료를 볼 수도 있다.

그는 시를 쓰면서 일제에 저항하고 불의에 항거한 지사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많은 수필도 남겼다. 술을 주제로 한 수필도 여럿 썼다. 주도유단, 춘풍주담, 술은 인정이라, 통행금지 시간, 우익좌파, 호리입법론 등이 대표적이다. 호리(壺裡)는 술병을 뜻하니 호리입법론은 술 취했을 경우에 대비한 행동요령 쯤 되겠다. 그 행동요령의 제1조가 ‘술이 취해서 집으로 갈 때는 너의 취중의 발길을 정반대 방향으로 돌려야 한다’이다. 술꾼이면 누구나 그렇듯 그도 술에 취하면 늘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고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던 것 같다.

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건 그만큼 술을 마셨다는 증거다. 조지훈은 왜 만48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 수밖에 없었을 만큼 마셔댔을까. 일제 강점기 아래 조국의 암울한 현실, 해방 이후 극심한 좌우대립, 한국전쟁 이후 불안한 사회 때문이었다.

현진건의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새벽 2시, 술에 잔뜩 취해 집으로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가 묻는다.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는가.” 암울한 시기에 무력감에 빠져 술로 세월을 보내는 남편은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했다”고 푸념한다.

조지훈과 현진건의 술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몹쓸 사회’가 있었다. 하지만 술을 권하는 건 요즘 사회도 마찬가지다. 막걸리집이든, 맥주집이든 이런저런 시름을 잔에 담아 마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 수십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 사회는 술을 당기게 만든다.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자와 여자의 차별로 여전히 불평등이 판을 치고 있다. 그동안 급등한 부동산가격과 최근 들어 치솟고 있는 물가로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다. 언론은 여론을 통해 갈등을 부추기기만 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런 불평등과 갈등을 해결할 능력은 없는 것처럼 보이고 서민들은 그저 세금이 아깝다고 한탄만 할 뿐이다.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고 답답하기만 하니 술로 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답답해서 가능한 꺼내지 않으려 한 것이 정치이야기다.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답답함은 커져만 간다. 돌아가는 모양을 보자니 자리싸움에만 혈안이다. 여당이 된 국민의힘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정부와 힘을 합쳐 정책을 개발하고 국정에 반영할지는 뒷전이다.

정부도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만 5세 입학’ 역풍에 박순애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사퇴했다. 취임한 지 불과 34일 만이다. 사퇴라는 형식이지만 사실상 경질 아닌가.

날은 푹푹 찌는데, 불쾌지수는 높아지는데, 이 사회는 이래저래 술을 권한다. 그것도 여당이, 정부가 술을 권한다. 술을 권할 땐 마실 수밖에 없다. 핑곗거리라고 힐난할 수도 있지만 맨 정신으로 가기 어려울 땐 비틀걸음으로라도 가야하기 때문이다.

소설 ‘술 권하는 사회’는 이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지 모르는 아내의 푸념으로 끝을 맺는다.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조지훈은 수필로 답을 말해준다. 그가 크게 취한 어느 날 호리입법론을 떠올리고 집과 반대방향으로 가다가 더 헤매고 말았다. 그는 다음날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길에는 취해서 가는 길이 옳고 바를 수도 있다.”

박운석(한국발효술교육연구원장)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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