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에녹 원장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사후세계에 대한 불확실은 두려움을 넘어 구원을 꿈꾼다. 어느새 현실의 삶은 고통과 죄과가 되고 구원을 통한 순백의 영혼을 원하게 된다. 그것은 ‘영생’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한 간절한 바람이자 욕망이다. 살아온 세상으로부터 지워지지 않으려는 안간힘이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나는 신이다’가 몰고 온 사이비종교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식을 줄 모른다. 특히 반 JMS 활동가이자 JMS 피해자모임 ‘엑소더스’ 대표였던 김도형 단국대 교수의 폭로는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사회지도층을 비롯해 연예계와 대중매체에서 실질적 권력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은 두렵기조차 하다. 종교적 신념인 개인의 자유 영역이라면 이를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개개인의 선택을 넘어 억압과 유무형의 폭행이 동반되는 구조라면 이것은 범죄이자 ‘절대 악’이다. 이러한 일탈이 개인이나 조직을 벗어난 사회 병리 현상이 될 때 우리 사회의 혼란은 걷잡을 수 없다.

필자의 기억 속에 잊히지 않는 사건이 있다. 다미선교회의 ‘시한부 종말론’이 그것이다. 1998년 목사 출신인 이장림은 다미선교회를 설립하고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공중 들어 올림)가 있다고 선포했다. 당시 거리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구호와 울부짖는 기도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밤낮이 따로 없었고 예정일이 가까울수록 그 규모는 커졌다. 가족 해체와 붕괴 그리고 학교엔 결석생이 끊이질 않았다. 10월 28일 당일엔 TV 방송국과 외신 기자들까지 취재에 나섰다. 그날 밤 마감 뉴스를 통해 생방송으로 흰색의 ‘승천복’을 입은 추종자들과 신도들을 내보냈다. 눈물과 간절함이 빚어낸 휴거는 오지 않았다. “형제 여러분! 우리나라 시간이 아니라 예루살렘 시간으로 자정입니다”라던 당시 신도들의 말은 간절함의 정점이었다. 이후 거짓으로 판명되고 이장림은 사기죄로 기소되었지만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유사한 믿음은 ‘JMS’나 ‘아가동산’ 등의 사이비종교로 이어지고 있다.

사이비종교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가까운 일본의 ‘옴진리교’ 지하철 사린 가스 테러는 일본 사회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교주를 비롯한 신도 900여 명의 집단자살로 마감된 남미 가이아나의 ‘인민사원’ 사건은 재앙에 가까웠다. 다소 성격적 차이는 있으나 중국의 ‘파룬궁’ 사건 역시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의 사이비종교 문제는 시대마다 크나큰 사회문제로 대두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제 강점기의 ‘백백교’를 시작으로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은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이비종교의 비극이었다. 무엇이 우리 사회에서 사이비종교의 토양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흔히 집단 무의식이 만들어 가는 최면 효과를 ‘집단 최면’으로 부른다. ‘우리’라는 테두리를 짓다 보면 어느새 개인은 사라지고 전체주의적 ‘집단’만 남게 된다. 그것은 폐쇄적 구조 속에서 모든 현실을 바라보고 ‘확증편향’의 형태로 ‘동지와 적’이라는 이분법적 시각을 유지한다. ‘모난 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우리 문화의 미덕이 오히려 ‘무리의 폭력’을 양산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세상에서 ‘잊히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구원자를 요구하듯 ‘무리 속 권력’은 사이비종교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천국의 문은 단순한 ‘믿음’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늘의 뜻을 알고 이행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불이문’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통과하는 불신자들의 깨달음은 현실과 해탈의 속성이 개인에게 있음을 나타낸다. 거짓된 모습으로 감성에 호소하는 지도자는 이미 구원자가 아니다. 분별할 능력이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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