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욱

애녹 원장

하늘에 오르는 것은 인간의 꿈이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잠재된 욕망의 실현이었다. 날개는 하늘을 오르기 위한 필연적 수단이었다. 닿지 못할 ‘하늘’이 인간이 갖고자 한 욕망이라면 ‘날개’는 욕망 실현의 구체적 힘이 되었다. 하지만 때로 날개는 무모한 욕망에 따른 추락의 도구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Icarus)의 날개’는 비상과 추락의 양면을 보여준다. 이카로스의 아버지인 다이달로스는 미노스 왕의 명령으로 미궁을 짓게 된다. 미궁이 완성되자 자신의 비밀이 누설될까 두려운 왕은 이카로스 부자마저 가두고 만다. 손재주가 좋은 ‘다이달로스’는 작은 창문을 통해 날아든 새들의 깃털을 모아 만든 밀랍날개를 이용해 탈출한다. 이후 이카로스는 새처럼 날 수 있는 능력을 신기해하며 ‘더 높이, 더 빠르게’ 날아오르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누이 강조하며 반복한 경고가 그것이었음에도 말이다. 밀랍으로 붙인 날개는 결국 태양열에 녹아내렸고 이카로스는 에게해에 떨어져 죽는다.

하늘을 향해 날고자 하는 욕망은 ‘억압과 폐쇄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의지의 다른 모습이다. 느린 현실의 세상이 만들어온 고착된 일상을 벗어나고자 한 이카로스의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단순히 무모함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더 높은 곳과 더 빠르기’를 강조해 온 오늘날의 결실은 어쩌면 신화 속 무모함처럼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인류 발전의 자양분이었고 거듭된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은 도전의 모습으로 거듭나곤 했다. 돌을 황금으로 바꾸려 한 연금술이 오늘날의 화학에 공헌해 온 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결과 이전에 반복된 안타까운 희생이다.

논어에 ‘항룡유회’라는 말이 있다. ‘항룡’은 하늘 끝까지 올라간 용을 의미한다. 끝없는 욕심으로 자꾸만 올라가다 하늘 끝에 닿아서야 후회하게 된다는 말이다. 흔히 우리는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을 ‘용’에 비유한다. 동양적 사고에서 용은 신비의 동물이자 최고 권력의 상징이니 비유의 의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치권력자의 비상처럼, 용이 되기 직전의 잠룡, 잠룡이 세상에 나와 용이 되면 현룡, 이후 하늘로 날아오르면 비룡, 최고의 극단인 하늘에 다다른 항룡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잠룡으로 비유되는 이들은 차기 대권 주자로 여론조사와 ‘하마평’이 무성한 사람들일 것이다. 주역은 이들을 위해 ‘잠룡물용’이란 말로 교훈을 주고 있다. ‘물에 잠겨 있는 용은 쓰지 않는다’라는 의미로서 얕은 재주로 사사로이 자신을 드러내는 ‘준비되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진정한 권력자가 되기 위해선 자신의 인격과 능력을 배양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라는 말이다.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말임이 분명하다.

최근 총선을 앞두고 MZ세대에 대한 정치권의 구애가 뜨겁다. 젊은 세대를 통한 역동적인 국가 발전과 미래를 도모하고자 한다면 환영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팬덤정치’에 맛 들인 정치인들의 얕은 전략이라면 그것은 이카로스의 ‘밀랍날개’와 다르지 않다. 만족을 모른 체 자신의 권력욕을 채워가는 그들에게 결코 추락은 아름다울 수 없다. 영원한 '날개'로 믿었던 팬덤이 돌아설 때 그들에게 극단적 희생과 후회가 따라올 것은 분명하다.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퇴보의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분명 ‘무모한 욕망’에는 그 끝이 존재한다. 최고 권력자든, 그것을 꿈꾸는 자든 높이 오르려는 욕망의 한계는 ‘적당함과 겸손’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다시 비상할 날개를 가진 아름다운 추락이기 때문이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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