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단상

오철환

객원논설위원

성마른 매화가 찬바람을 무릅쓰고 전령을 떠맡았다. 남쪽에서 올라온 벚꽃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리는 가운데 점잖게 자리 잡은 목련이 달덩이 같은 얼굴로 반가운 손님을 맞는다. 양지바른 언덕 빼기엔 개나리가 자지러지고 연초록 잎망울이 눈을 뜨는 나뭇가지 사이로 진달래가 부끄럽게 숨어있다. 모진 북풍에 웅크리고 있던 자두나무 등걸에도 하얀 꽃눈이 맺힌다. 화단에 빽빽이 서있는 영산홍은 잠에 겨운 눈을 끔뻑이고 있다. 백화제방,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난다.

봄이 점점 다가온다. 집안에서도 봄기운을 느낀다. 베란다에 늘어선 화분에도 봄의 모습이 눈에 띈다. 이름 모를 연초록이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모가지를 뽑아든다. 과일을 먹고 난 후, 그 씨앗을 화분에 심어 둔 것이 싹이 난 모양이다. 사과, 배, 복숭아, 자두, 포도 등 과일에서부터 호박, 감자, 귀리 등 곡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씨앗을 화분 여기저기에 묻어놨으니 그 정체를 알 방법이 없다.

때에 맞춰 흙을 뚫고 올라오는 올망졸망한 새싹을 바라보노라면 절로 화기가 돌고 미소가 인다. 자연의 소리 없는 교향악이 들려오고 생명의 숨결이 담긴 천의무봉의 걸작이 눈앞에 펼쳐진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향연을 대하다보면 온 몸을 가로지르는 전율을 느낀다. 주눅 든 생에 대한 회의가 눈 녹듯 스러지고 삶에 대한 애정과 희망, 풋풋한 생기와 신선한 용기가 잔잔하게 차오른다. 봄은 생명의 신비를 전해주는 천사다.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은 곳이 있다. 정치판이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가고 사방이 화사한 꽃들로 백화제방인데 정치권은 아직도 백해무익한 싸움판이다. 추악한 당파싸움이 외교로 번져 국익을 훼손하고 있고, 그 불꽃이 법정과 헌법재판소로 옮겨 붙어 법치를 유린하고 있다. 백가쟁명으로 다양한 아이디어가 분출되고 사회가 활력을 되찾아야 할 텐데 오히려 내로남불 자기합리화로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난다.

선조 때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싸우다가 임진왜란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고, 인조 때 사색당파로 나뉘어 치고받다가 삼전도의 치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각한 위기상황이다. 그 준엄한 역사의 가르침을 잊은 채, 출세욕에 눈먼 특정 당파의 리더가 뉴스 화면에 수시로 나와 말도 되지 않는 거짓말로 국민을 속이려 하고 있다. 그릇된 권력 의지와 집권 욕심에 사로잡혀 국익과 민생은 내팽개친 듯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다.

지난 정권은 온갖 저지레를 했다. 애써 마무리한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깨트리고, 징용 배상 판결을 고의성을 의심할 정도로 방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하면서까지 이뤄낸 한일 합의를 단숨에 무위로 만들어버렸다. 박근혜 대통령이 욕먹을 각오로 결단한 위안부 합의를 손바닥 뒤집듯 뒤엎었다. 감당도 못할 일을 저지르곤 뒷수습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물러났다.

그 뒷수습을 떠안은 윤석열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이 먹었던 욕을 곱빼기로 먹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해하기는커녕 삭발을 하고 죽창가를 불러대는 심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모두 다 세상 이치를 알 만한 사람들이 아닌가. 백화가 만발한 봄을 맞아 모두 당파를 떠나 심신을 일신하고 나라와 국민을 위해 머리를 맞대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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