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새 / 고영

나 어릴 적엔 콩나물밥이 좋았다/노란 양푼에 퍼주는 후박함이 일단 좋았다/양념간장에 비벼먹고 물을 마시면/뱃속에선 콩나물시루처럼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그 소리는 흥겨운 박새 울음 같아서/종일 들판을 헤집고 다녀도 잡을 수가 없었다/나는 그냥 뱃속에 박새를 키우기로 했다/그리고 아이답게 금세 잊어먹었다//콩나물밥을 먹지 않아도 될 만큼만/어른이 된 어느 날이었다/술 깬 새벽에 목이 타 냉수를 들이켰는데/뱃속에선 죽은 아버지 가래 끓는 소리가 났다/그 소리는 슬픈 박새 울음 같아서/뱃속에 나보다 빨리 늙는 새가 살고 있다는 걸 알았다/나는 그냥 뱃속에 박새를 묻어두기로 했다/그리고 어른답게 슬픔을 참기로 했다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2018, 문학의 전당) 전문

그리고 어른답게 슬픔을 참기로 했다는 시의 마지막 고백은 울음을 터뜨렸다는 말보다 슬프다. 어른이라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대체 어른답다는 게 뭘까?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시인의 「원고지의 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억에도 정류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 때나 타고 내릴 수 있게….” 그렇다면 그는 기억 앞에서 때로 속수무책이라는 말이 되고, 그럴 때도 어른답게 슬픔을 꾹 참는 모양이다. 하필이면 행복한 기억이 아니라 슬픈 기억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마음대로 타고 싶어 한다면 분명 행복한 쪽일 텐데, 나는 시인이 기억이라는 기차에서 내리고 싶어 한다고 제멋대로 믿어버린다. 여기에 이유가 없지는 않다. 가령 「산복도로에 쪽배가 떴다」 발문에서 함민복 시인은 고영이라는 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귀띔한다.

“‘내 귓속에는 막다른 골목이 있고,/사람 사는 세상에서 밀려난 작은 소리들이/따각따각 걸어 들어와/어둡고 찬 바닥에 몸을 누이는 슬픈 골목이 있’다고 시를 쓴 고영 시인은 선천적으로 마음이 여리다. 그의 여린 마음이 세상을 읽는 눈이다. 그의 눈빛은 물처럼 출렁거리고 폐가처럼 예민하다.” 시인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본 적이 없으니 그의 눈빛이 물처럼 출렁거리고 폐가처럼 예민한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시가 “리어카 바퀴를 붙들고 늘어지는 첫눈의 신음 소리”와 “좌판대 널빤지 위에서/푸른 수의를 껴입은 고등어가 토해놓은/비릿한 파도 소리”조차 아파함은 분명하다.

시인은 자신의 뱃속에 키우던 박새가 “죽은 아버지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고 들려준다. 어릴 적, 콩나물밥을 양념간장에 비벼 먹고 마시던 물이 흥겨운 박새 울음소리를 냈다면, 이제 어른이 되어 술이 깬 새벽에 마시는 냉수는 “나보다 빨리 늙는” 슬픈 박새 소리로 우는 것이다. 이때의 박새는 아마도 “전적으로 타인이면서 동시에 ‘나’인 낯선 이”(엠마누엘 레비나스)에 대한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리라. 해서 시인은 어른답게,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꾹, 참았으리라.

신상조(문학평론가)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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