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의 상처는 바깥의 상처로 잠시 잊을 수 있다 안의 상처가 거세지면 바깥의 상처는 감각을 부수고 안으로 깊이 들어가/모든 바깥은 안이 된다//안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바깥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뒤집힌 안은 바깥이 되고//나는 한 번도 너의 바깥인 적 없다/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4월은 먼지와 꽃을 앓으면서 봄의 뼈대를 물고 있다 행복한 개는 꼬리를 오른쪽으로 흔들고 슬픈 개는 왼쪽으로 흔든다는데 나의 고개는 안쪽으로 기울고 또 나는 바깥쪽으로만 기운다 불투명한 시대에 살면서 방향 때문에 외롭지는 말자//우리가 우거지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우스운 모습이 앙상할 때만/뚜렷하게 보이는 우리/안과 밖의 어디쯤에서/우리를 가두고 있는/우리라는 말

「빨강해」(2019, 달을쏘다) 전문



“내가 속해있는 5·18 민주화 운동 단톡에는 쉴 새 없이 관련 단체끼리의 상호비방이나 법적 대응에 관한 소식이 올라온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순수한 마음과 정신은 오간 데 없고 지원금, 보조금, 이권 등의 잿밥을 노린 아귀다툼으로 얼룩져 있다. 5·18 유공자 명단을 공개하고 엄격하게 검증하면 문제 단체들은 어느 정도 정리될 것이다.”

지난 17일, 「5월을 더 아프게 하지 말라」라는 제목으로 쓴 윤일현 시인의 글 중 한 대목이다. 변질을 걱정하던 이들은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을 테고, 잿밥에 마음이 있는 이들은 마땅찮은 반응을 보였을 거다. 물론 성급한 이분화는 옳지 않다. 비록 썩은 과일에 몰려드는 초파리 같은 후자가 아니더라도, 부정적인 여론 그 자체가 5·18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신중론자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치우친 보수와 치우친 진보라고 표현하기를 즐긴다. 이는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치게 편향된 나머지 이쪽은 저쪽의 말에, 저쪽은 이쪽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 편협한 자세나 태도를 비판하기 위함이다. 위의 시에서 “우리가 우거지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라고 시인이 걱정하는 이유도 바로 이 ‘우리’라는 치우침을 걱정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언어는 마치 성근 그물과 같아서, 치우침과 관련한 수많은 ‘왜’와 ‘어떻게’를 놓쳐버린다.

이 시는 세상 사람들이 안과 밖,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뉜 채 ‘우리’ 안에 갇혀 있다고 본다. 이 중에서도 가장 역겨운 치들은 뼈다귀를 보고 몰려드는 개와 같은 부류일 것이다. “행복한 개는 꼬리를 오른쪽으로 흔들고 슬픈 개는 왼쪽으로 흔든다”는 문장은 그런 맥락에서 매우 날 선 풍자다. 오른쪽으로 흔들든 왼쪽으로 흔들든, 뼈다귀를 물고 만족하든 뼈다귀를 빼앗겨서 배가 고프든, 개는 그저 개일 뿐이다. 나는 한 번도 너의 바깥인 적 없지만, 그렇다고 안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고 시인은 고백한다. ‘우리’를 거부하는 중립적 자세는 이성적 냉정함일 수도, 환멸에 의한 우울일 수도 있다. 당신은 어느 쪽인지?

신상조(문학평론가)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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