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왕의 세습제 이룬 내물왕부터 신라 중흥기 이루면서 경덕왕이 최고의 전성기 맞아



▲ 신라 최대의 영토를 넓히면서 정복군주로 회자되는 진흥왕의 능.
▲ 신라 최대의 영토를 넓히면서 정복군주로 회자되는 진흥왕의 능.


신라는 BC 57년 건국해 백제, 고구려 삼국전쟁 시기를 거쳐 삼국을 통일하고,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면서 1천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신라 천년의 시간을 건국기와 중흥기, 최고 전성기, 패망에 이르는 하반기로 나눈다면 중흥기와 최고 전성기는 내물왕 때부터 지증왕과 법흥왕, 진흥왕을 거쳐 경덕왕 때까지로 나눌 수 있다.



김씨 왕이 본격적으로 세습을 시작하게 된 내물왕 시대에는 고구려의 힘을 빌려 삼국이 서로 견제하면서 내적 성장을 도모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침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한 진흥왕 시대에는 이사부와 거칠부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미실이라는 인물과 사다함, 문노 등의 화랑들이 나타났다.



삼국통일을 이루어가는 과정에는 김춘추 태종무열왕과 김유신, 문무왕, 김인문 등의 활약이 눈에 띈다. 경덕왕 때에는 월명, 충담, 표훈 등의 고승들이 나타나 화려한 문화예술을 꽃피우며 최고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 선덕여왕이 자장 율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룡사지에 세운 황룡사구층목탑의 심초석.
▲ 선덕여왕이 자장 율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황룡사지에 세운 황룡사구층목탑의 심초석.




◆내물왕

신라 17대 내물왕은 미추왕의 사위다. 이때부터 김씨 왕위 세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많은 인물들이 쏟아졌다.



미추왕의 부인이 석씨 왕손의 공주였기 때문에 석씨 계에서는 흘해왕이 아들 없이 죽자 석씨 계와 가까운 혈통이자 성씨로도 위협적이지 않은 내물을 왕으로 적극 추대했다.



내물왕은 왕위를 이어받고부터는 우선 왕권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제도적 정비와 함께 인재를 고루 적소에 등용했다. 특히 김씨 계통의 인재를 중용해 김씨 세력의 확장을 도모했다.



내물왕은 당시 백제가 왜와 손을 잡고 수시로 국경을 쳐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히고, 곡식과 물자를 약탈해 갔다. 이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고구려에 읍소하며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때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면서 세력을 키워가며 왕권에 은근히 도전하고 있던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버렸다.

▲ 이사부 장군이 호령하던 시절, 충북 청주 지역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쌓은 상당산성.
▲ 이사부 장군이 호령하던 시절, 충북 청주 지역 백성들의 안전을 위해 쌓은 상당산성.


술수에 능했던 실성이 내물왕 죽음 이후 귀족회의를 손에 넣고 왕으로 추대돼 개인적인 원한을 풀어가는 실정을 펼쳐 자신도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내물왕의 아들 눌지가 실성왕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라 다시 김씨 왕위 세습의 뿌리를 튼튼하게 했다.



자비왕과 소지왕은 내물왕에 이은 눌지왕의 강력한 통치력에 의한 중앙집권적 왕권강화에서 비롯된 세습제로 왕위를 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신라의 국력은 백제와 왜, 고구려에 비해 크게 뛰어나지 않아 끊임없는 침략전쟁을 겪었다.



자비왕은 튼튼한 국방을 위해 궁궐이 있는 월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기 시작해 소지왕 때 월성 보강공사를 마무리하고 천년의 궁성 월성으로 복귀했다.



소지왕은 짧은 평화시기를 맞아 벽화라는 여인에 빠져 국정에 나태함을 보이며 어지러운 내정으로 혼란을 초래했다. 결국 소지왕은 아들에게 왕위를 이어주지 못하고, 4촌이었던 지증왕이 64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었다.



신라 제22대 지증왕은 내물왕의 증손자로 64세에 왕위에 올라 14년 동안 집권했다. 지도로, 지대로, 지철로왕이라고도 불렸다. 지증왕은 처음으로 왕호를 ‘왕’으로 고쳤고, 국호를 ‘신라’로 변경했다. 덕업일신 망라사방이라는 글에서 따온 말이다.



지증왕은 순장제도를 금지하고, 소로 농사를 짓는 농경법을 실시하면서 농사를 크게 장려해 생산성을 높였다. 석빙고를 만들어 얼음을 저장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또 서라벌 동쪽에 시장을 개설하고, 나라의 군현을 정비해 처음으로 군주를 파견해 백성들을 직접 통치하며 보살폈다. 이사부 장군을 파견해 당시 우산국으로 불리던 울릉도를 복속하도록 하는 등 나라의 영토를 넓히는 일에도 적극 나서는 한편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제도를 마련해 국가로서의 기능을 활성화 했다.

▲ 선덕여왕 때 조성했으며 자장과 원효가 주석으로 있었던 분황사 모전석탑.
▲ 선덕여왕 때 조성했으며 자장과 원효가 주석으로 있었던 분황사 모전석탑.




◆진흥왕

신라 제24대 진흥왕은 한창 어리광을 부릴 나이에 왕위에 올라 어머니의 섭정으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왕은 어머니가 섭정을 하는 동안 계부 이사부와 귀족들이 휘두르는 권력다툼을 지켜봤다.



진흥왕은 성인이 돼 친정을 시작하면서 정복군주로 나서 가야를 합병하고,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해 영토를 크게 확장하는 한편 왕권 강화를 위해 제도적인 정비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중앙권력의 핵심세력으로 기능하던 이사부와 거칠부 등의 귀족들도 정복전쟁의 최일선으로 내몰아 귀족들의 세력을 적절히 견제했다. 왕권의 안정적인 성장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흥륜사와 황룡사 건설 등으로 불교 중흥에도 심력을 쏟았다.



진흥왕은 신라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고, 화랑제도 창설, 불교진흥, 국사 편찬 등의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은 평화롭지 못했다.

▲ 선덕여왕이 천문지리를 살피기 위해 조성했다는 경주 첨성대 야경.
▲ 선덕여왕이 천문지리를 살피기 위해 조성했다는 경주 첨성대 야경.


후궁 미실이 화랑, 귀족세력과 결탁하면서 왕권을 탈취하고, 진흥왕을 흥륜사에 감금해 43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했다.



이사부는 법흥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와 결혼해 숙명궁주와 세종을 낳았다. 숙명궁주는 진지왕의 아내가 됐고, 세종은 미실을 아내로 두고, 풍월주가 돼 신라의 병권을 손에 넣었던 실력자의 위치에 올랐다.



이사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 있었지만 절대 교만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위한 일에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그래서 얼마든지 왕의 자리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아들, 손자뻘 어린 왕손들에게 지위를 물려주면서 죽을 때까지 선비적 풍모를 잃지 않았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은 진흥왕의 손자로 13세에 왕위에 올라 67세까지 54년 간 신라를 다스렸다. 박혁거세 61년의 즉위 기간 다음으로 가장 오랜 시간을 집권한 왕이다.



진평왕은 진흥왕이 넓혀 놓은 영토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쳐들어오는 적들과의 전쟁에 많은 시간과 국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때문에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남산성을 길게 쌓아 올리고, 명활성과 서형산성을 다시 정비했다.



선덕여왕은 54년이나 집권한 진평왕의 둘째 딸이다. 신라는 물론 고구려, 백제, 가야 등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여성으로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주목받는 역사 속의 주요 인물이다. 용춘과 용수, 그리고 김춘추와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의 도움으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 경주시가지에서 울산 방향으로 향하는 낭산 사천왕사지 주변 7번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신문왕릉.
▲ 경주시가지에서 울산 방향으로 향하는 낭산 사천왕사지 주변 7번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신문왕릉.


신라 30대왕 문무왕의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법민이며 아버지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이다. 어머니는 김유신 장군의 여동생인 문희, 문명 부인이다. 왕비는 파진찬이었던 선품의 딸 자의 왕후다.



법민은 어려서부터 외모가 출중하고 총명했다.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을 역임했으며 얼마 뒤에 태자로 책봉된 후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이듬해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에게는 부왕이 미처 하지 못한 삼국통일의 과업이 남아 있었다. 문무왕은 668년 당나라와 협공으로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당의 군사들은 철수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신라를 공격하려는 낌새를 보였다. 왕은 외삼촌인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벽하게 이룩했다.



신문왕 정명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문무왕과 비밀결사대장에게서 무예수업을 받았다. 정명은 타고난 무인체질로 아버지보다 훨씬 빠르게 무예를 습득하고, 아버지를 따라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터를 누비면서 실전을 경험해 누구보다 뛰어난 무술실력을 갖췄다.



신문왕이 죽고, 신목 왕후의 아들이 어린 나이에 효소왕으로 즉위하자 신문왕 당시 힘을 잃고 있던 김흠돌 추종세력들이 힘을 길러 효소왕을 밀어내고 효명 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했는데 그가 성덕왕이다.



성덕왕은 자신이 경험했던 전철을 또 답습하는 비운의 왕이 되었다. 성덕왕은 김원태의 딸을 성정 왕후로 맞아들였으나, 김순원의 딸 소덕 왕후를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하면서 성정 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왕자가 궁을 떠나야 하는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되었다.



신라 성덕왕의 큰아들 중경 태자는 정치적 세력의 압력에 밀려 태자의 신분을 버리고 도망자가 돼 우여곡절을 겪으며 중국 구화산에 이르렀다. 중경 태자 김교각은 깨달음을 얻어 중생들을 위한 고행 끝에 99세의 일기로 구화산 화성사에서 입적해 등신불이 됐다. 구화산 화성사는 자존심 높기로 이름난 중국 4대 불교성지로 손꼽히고 있다. 김교각은 신라인의 자긍심을 무한으로 높였다.

▲ 충담이 경덕왕의 요청으로 안민가를 지었다는 곳으로 전하는 월정교의 복원된 모습.
▲ 충담이 경덕왕의 요청으로 안민가를 지었다는 곳으로 전하는 월정교의 복원된 모습.


◆경덕왕

경덕왕은 어릴 때부터 안전하고 건강한 나라, 행복하고 평화로운 날들을 이어가는 백성들의 삶을 최고의 정치목표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경덕왕은 바둑의 귀재이자 제갈량의 지혜를 가졌으면서 1대 1의 상황에서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을 무위를 가진 난세를 타개해나가는데 관리로서는 최고의 덕목을 가진 신충을 정치의 스승으로 삼았다.



경덕왕은 강한 집념을 가졌으면서도 타협과 양보의 겸양을 갖추었다. 지혜를 발휘해 귀족들의 세력다툼을 교묘하게 이용해 국력을 기르는 힘으로 전환시켜 활용해 신라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 신라 최고의 전성기를 꾸렸던 35대 경덕왕의 능.
▲ 신라 최고의 전성기를 꾸렸던 35대 경덕왕의 능.


귀족들의 자녀들을 중국으로 유학하게 하고, 우수한 인재가 되어 돌아오면 중요한 일을 맡겨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자연스럽게 귀족들이 세력다툼에서 왕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충담은 경덕왕이 “과인이 들어보니 스님께서 화랑 기파랑을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다는데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노래를 지어줄 수 있는지요”라고 청했다. 이에 충담사는 흔쾌히 답하고 그 자리에서 ‘안민가’를 지어 바쳤다.



경덕왕이 충담의 노래를 듣고, 그를 존경해 나라의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지만 충담은 거듭 사양하고 총총히 일어나 자리를 떠나갔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