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 이상규 경북대 명예교수, 전 국립국어원장
최근 이런 생각을 해본다. 왜 중국과 조선이 함께 몰락했을까? 조선 몰락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18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여러 나라는 노동자혁명으로 혼란의 깊은 늪으로 빠져들었다. 도리어 마르크스 공산주의 혁명은 유럽이 아닌 구소련과 중국 등 유라시아를 휩쓸었다. 유럽 사회는 노동자 농민 혁명이 먼저 일어나고도 정작 자유주의 민주화에 성공하고 인권 또한 공산주의사회 국가보다 더 발전되었다. 이 이면에는 이성적인 시민 문명의식의 발전 토대가 자유주의를 지키는 중요한 요인이 아니었을까?
조선 후기 성리학 중심의 국가 정체성이 무너지는 과정에 중국과 더불어 중국 공안파의 영향을 받은 일군의 문예 세력들이 등장한다. 박지원, 유득공, 박세채, 이덕무 등 진보적 양명학을 수용하면서 청조의 학문을 유입하여 고문체에 대응하는 소품체 글쓰기로 일대 문체변혁을 불러온 백탑파가 등장하였다. 그 주역들은 원각사 주변에 밀집한 사대부가의 서얼 출신들이다.

지배층인 양반들의 모순을 조롱하고 가혹한 수탈을 비판하는 글쓰기 재주꾼들의 대표로 연암 박지원을 손꼽는다. 그러나 연암은 여항인들 편에서 글을 썼지만 여항인을 바라보는 입장을 뛰어넘어 여항인들과의 일체성을 갖지 못했던 한계를 지녔다. 이들 가운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역관 출신 송목 이안진(1740~1766)은 27세로 병마와 시달리면서 “호동거실”이라는 조선조 최고의 저항문학을 남겼다.

호동이라는 여항인들의 길거리에서 바라다 보이는 풍경과 가난한 여항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일체화시키며 쓴 연작시이다. 은유로 가득한 저항과 조롱, 사대부들의 모순을 고발하는 내용이 가득한 불온한 글쓰기로 조선 후기 문학사에 일대 획을 그었다. 박지원과 이용휴 등 백탑파 성원들도 그의 요절을 안타까워했다. 만일 마르크스가 조선 이안진의 “호동거실”이라는 시를 보았다면 민중 혁명시인으로 높이 평가했으리라. 조선 후기의 계급구조의 와해와 함께 민중의 목소리가 더욱 거세어지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하였다. 어쩌면 조선 후기 끊임없이 일어난 민란의 동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조 후기 사회에 도입된 양명학과 청조의 북학이라는 전근대적 사회주의 이론이 문예미학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들었다. 양명학 치양지(致良知)의 깃발을 든 성리학에 대한 비판적 학문이 명청 교체기에 유입되면서 조선조 사상적 지각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홍대용, 박연암, 이서구, 박제가, 서상수, 이경우, 이안진, 이옥, 김려와 같은 소문체의 문체 변화와 함께 여항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시, 전, 희곡, 소설과 같은 문예물로 쏟아져 나왔다.

조선 사회의 지배체계가 송두리체 흔들리는 정체성의 지각변동을 몰아오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거대한 중국과 함께, 조선 역시 문예사상가들의 글쓰기는 빗나간 화살로 현실 개혁에 실패하면서 결국 명나라와 조선은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자기 조절 능력을 잃어버린 뒤끓는 불평불만만 쏟아내는 선동이 결국 민란으로 이어지면서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조 말 이덕무, 이서구, 박세채, 유덕공이 일으킨 소품체 구두 언어 화법 글쓰기를 통한 현실적 비판은 지축을 흔들었다. 여항인이나 민초들의 눈높이에 맞춘 계급 불평등이나 양반들의 신분적 모순을 강하게 비판하였지만 정치 체계로 완성하지 못했다. 계속된 사회체제의 교란과 흔들림은 급기야 동학란과 의병란으로 연결되어 결국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념과 사회의 변동을 야기한 밑바탕에는 정치적 힘보다 어쩌면 문화와 사상적 영향력이 더 컸던 것이다. 조선조 후기 사회의 역사적 흐름을 되돌아보면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영국과 프랑스가 노동자와 농민혁명이 먼저 일어났지만 공산주의로 전락하지 않게 된 것은 높은 시민의식으로 시민들의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고 조절해내는 역량을 가진 이유가 아닐까?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숙성의 결과이다.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 이후 시민 정신이 중심을 잃지 않았던 덕분이다. 자제와 통제력을 잃지 않은 시민들의 성숙된 의식 때문이다. 문예활동으로 사회적 비판에 앞서는 일은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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