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대한 위선

“군사 정권 때부터 이어진 성 금기 다들 무결점의 도덕적 인간인 척 성 접근에 대한 공개적 논의 필요”

2017.09.12

윤정대
변호사


내 젊은 시절은 군사 정부가 집권한 시기였다.
개인의 자유에 대해 억압한 것과 마찬가지로 성에 관한 공개적인 담론(談論)도 억압하였다.
그 시절 읽었던 성에 관한 낯선 두 개의 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하나는 사랑과 섹스의 관계에 대한 사르트르의 글이었다.
사랑하는 남녀는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 섹스를 하지만 섹스는 육체적인 쾌락에 지배되므로 사랑과 섹스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실험실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섹스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기술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포르노의 효용에 관한 논쟁을 다룬 글이었다.
나는 이 무렵 시사(時事)에 대한 지식도 넓히고 영어공부도 하기 위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를 구독하였다.
타임지 말미에는 대개 흥미로운 주제의 에세이가 실려 있어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읽곤 했다.
그런데 한번은 거기에 포르노에 관한 글이 있었다.
포르노? 그렇다.
성적 욕구와 이를 자극하는 음란물의 효용에 대해 찬성하는 의견이 (반대하는 의견은 물론) 자세히 언급되어 있었다.

음란물의 효용에 대한 찬성하는 견해는 음란물 특히 음란영상물을 보는 것은 누구에게도 해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적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주는 수단이 되므로 성범죄를 줄인다는 것이었다.
반대 의견은 음란영상물이 성적 욕구를 부자연스럽게 높이고 섹스에 대해 잘못된 인식-여성을 성적 욕구의 대상물로 대하게 돼 오히려 성범죄를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성이나 음란물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기시하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와는 다른 포르노에 대한 공개적인 논란의 글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회는 과거 군사정권 시절뿐만 아니라 문민정부 시절에도 성이나 음란물에 대한 논의를 금기시해왔고 지금도 이런 태도에는 크게 변함이 없다.
겉보기에는 다들 무결점의 도덕적인 인간인 것처럼 행동한다.
흑과 백으로 구분하는 것처럼 절대적인 논리와 주장에 충실하다.
그래서인지 누구든지 결점이 드러나면 집단적으로 공격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우리 사회를 성적으로 절제되는 사회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오히려 내적으로는 성적으로 분방하고 인터넷, 방송, 스마트폰을 통해 음란물에 거의 제한 없이 접근하고 있는 지경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누구도 포르노는 이런 점에서 좋다거나 음란물에 대해 찬성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절대다수가 속으로는 포르노를 즐기더라도 겉으로는 포르노를 혐오하고 반대하는 위선적인 태도를 취한다.

성에 대해 겉으로는 결벽증에 사로잡힌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선시대 성리학적 관념적 교조주의가 유전인자로서 작용하고 거기다가 오랫동안 정치, 문화 등에 있어 비타협적, 비현실적 이념에 물들어서일까. 상투적인 이념적인 틀로는 현실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정치, 문화, 예술 등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성에 있어서도 과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다.

성적 담론을 무조건 매도하고 기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 음란물에 대해서 보더라도 음란물이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음란물에 어떻게 접근하고 제한할 것인지에 대해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공개적인 논의가 요구된다.
이런 논의 과정을 거쳐 음란물이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미성년자에 대해서는 음란물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반면 성인에 대해서는 허용의 범위를 넓혀 왔다고 할 것이다.

한때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등의 작품으로 우리 사회에 공개적으로 성적 담론을 던진 마광수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그는 소설 ‘즐거운 사라’로 형법 제243조 음란도서 제작ㆍ반포 등 죄목으로 구속되고 집행유예라는 형사처벌까지 받았다.
이후로 우울증과 편견에 시달렸고 끝내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우리 사회의 위선의 회생자라고 할 것이다.
윤정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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