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 1910년대 대구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청년들이 모인 단체다.“광복회라고 이름 지은 것은 일본에 빼앗긴 국권을 본래대로 돌이키고, 사물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다.”(당시 총사령 박상진의 말 중).1915년 8월25일 국권 회복과 독립을 꿈꾸며 달성공원에서 결성한 광복회는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비밀결사조직으로, 대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가장 격렬히 행동했던 자랑스러운 단체다.대구근대역사관이 오는 11월5일까지 2층 기획전시실에서 1910년대 대구를 대표하는 비밀결사조직 ‘광복회’를 조명하는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전시는 4부로 이뤄진다. 1부는 ‘달성공원에서 광복회가 결성되다’다. 광복회 결성과정과 조직, 광복회 결성 당시 대구의 모습 등을 당시 사진과 광복회 문서, 지도 등과 함께 만날 수 있다.‘청년들, 광복을 꿈꾸다’라는 주제의 2부는 광복을 위해 광복회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그 활동이 당시에 어떻게 비춰지고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특히 일제강점기 때 건립된 중구 서문로 대구경찰서 앞에 있었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가 중요한 연락 거점이었던 점과 대구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군자금 모집 활동인 ‘대구권총사건’(1916년 9월) 등을 사진과 신문기사 중심으로 소개한다.3부 주제는 ‘청년들, 꿈을 이루지 못하다’이다.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해 전국의 지부장 등 40여 명이 붙잡히면서 광복회가 와해하는 과정을 담았다. 1910년대 가장 많은 순국자가 나오고, 매우 치열하게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였다는 사실을 재판 관련 신문기사, 판결문, 편지 등을 통해 알 수 있다.이어 치열했던 독립투쟁의 모습이 이후 발전되는 과정을 ‘청년들의 꿈은 이어지다’를 주제로 하는 4부에서 만날 수 있다. 국권 회복과 독립을 꿈꾸던 청년들의 독립투쟁은 1919년 3·1운동으로 결집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1920년대 이후 더 격렬해진 의열활동으로 이어져 마침내 1945년 ‘광복’을 맞이하게 되는 뜻깊은 과정을 담는다.대구문화예술진흥원 신형석 박물관운영본부장은 “이번 전시는 달성공원에서 결성된 ‘광복회’에 대한 자료를 대구에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며 “특히 광복회의 본부가 대구경찰서 앞이었다는 내용 및 ‘상덕태상회’의 모습이 흐릿하게 담긴 신문 내용 등은 대구에서는 처음으로 선보인다. 대구 도심 안에서 벌어진 ‘대구권총사건’ 등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