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대며 들어와 옷걸이에 거는 하루/ 술에 쩐 어깻죽지에 매달린 한 짐 우수// 욕망의/ 붉은 눈동자/ 주름으로 눈 감는다// 너무 멀어 뵈지 않는 창천에 야훼보다/ 주머니 속 짜릿한 스킨십 황홀한 물신// 불 꺼진/ 벽 한 모서리/ 탈진해 버린 옷걸이「시조시학」 (2018, 여름호) 구관모 시인은 경북 칠곡에서 출생해 2018년 ‘시조시학’ 신인상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그의 시조는 인생 경륜에서 비롯된 내밀한 관조와 깊은 성찰의 시편들이다. 그런 까닭에 유한한 존재자로서의 고뇌와 갈등의 양상을 작품 곳곳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허무와 맞닥뜨려도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넉넉한 적공을 보인다. ‘옷걸이’는 생활에서 우러난 시다. 고된 일과를 마친 화자는 비틀대며 들어와 옷걸이에 하루를 건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요즈음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모두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마스크 시대를 힘겹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마스크를 곧 벗게 되겠지, 하는 기대감이 강했지만 지구촌 전체가 미증유의 사태를 대처하느라고 여전히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중이다. 화자는 다시 술에 쩐 어깻죽지에 매달린 한 짐 우수에 대해서 말한다. 이 시대는 나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한다, 라는 말을 오래전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술에 찌든 한 사람의 어깻죽지에 한 짐 우수가 매달려 있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 이 시대를 사수하고 있는 한 사내는 바로 우리 자신의 초상이다. 비단 코로나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결코 쉽지 않은 삶이다. 실로 먹고 살기가 점점 어려운 세상이다. 어깨에 얹힌 우수의 무게가 짓눌러대는 것을 한 사내는 몹시 버거워 한다. 그래서 욕망의 붉은 눈동자는 주름으로 눈을 감는 것이다. 다음으로 너무 멀어 뵈지 않는 창천에 야훼를 생각하기보다 주머니 속에 든 짜릿한 스킨십 황홀한 물신에 더 마음을 둔다. 그런 까닭에 화자는 불 꺼진 벽 한 모서리에 걸려 있는 탈진해 버린 옷걸이에서 자신의 모습을 읽는다. 둘째 수 초장에서 창천에 야훼, 라는 구절은 언뜻 생뚱맞게 보일 수도 있다. 창천은 동쪽 하늘이다. 야훼는 히브리어로 신을 표현하는 말로 구약성서에서 신을 부르는 명칭 중 하나다. 땅에 발 딛고 사는 이들은 너무 멀어 뵈지 않는 야훼보다 눈앞의 부귀영화에 더 이끌리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창천에 야훼를 떠올리고 있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물신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크고 놀라운 세계 즉 영원지향성을 마음 속 한 곳에 은밀히 보듬고 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아무리 재물과 명예, 권력이 좋다고 하지만 그것으로는 도무지 충족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불멸을 꿈꾸는 일일 것이다. 영원성에 대한 다함없는 염원이다. 그는 ‘사문진 나루터’라는 시조에서 낙동강 유원지로 스산한 바람이 불면 늙어서 고적한 강물이 넌지시 팔 벌리고 맞아주는 느낌이 들자 고해성사라도 하고 싶다, 라고 말한다. 미처 청산치 못한 자못 쓰린 사랑이 기억을 들춰내어 한껏 물어뜯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속 깊이 내려앉아버린 슬픔이 강물 위로 멀리 번지고 있기에 더욱 그러한 심사에 빠져든 것이다. 우리 삶에서 때로 이러한 정서순화의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일이기에. 어려움이 적지 않지만 골똘히 생각해 보면 입에서 감사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법한 나날이다. 이정환(시조 시인)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