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35대 경덕왕은 통일신라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기록되고 있다. 경덕왕 시대에 건축된 석굴암과 불국사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인들이 찾고 있는 국보로 등재된 문화재로 자랑스런 역사문화자산이다. 경덕왕은 문화예술 분야는 물론 외교와 정치적인 분야에서도 상당히 개혁적인 성향을 보여 왕실기구의 조직정비는 물론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기도 했다. 특히 귀족들의 견제를 이겨내고 인재를 양성하면서 국방을 튼튼히 하고, 석굴암과 불국사와 같은 불교정책도 함께 펼쳐 백성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한 노력도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경덕왕의 개혁적인 정치는 월정교, 춘양교와 같은 건축물에서도 알 수 있지만 충담 스님, 월명 스님 등의 고승들과의 만남을 통해 나라의 변괴를 잠재우고, 나라를 잘 다스려나갈 정책에 대한 고언을 듣기도 했다. ◆경덕왕의 즉위신라 35대 경덕왕은 성덕왕의 아들이자 효성왕의 동생으로 효성왕이 아들 없이 죽자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성덕왕 시대에는 귀족들의 세력다툼이 끊이지 않았으며 왕권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효성왕, 경덕왕으로 이어지는 시대에도 귀족들의 세력이 득세하여 실권을 잡고, 늘 왕권을 위협하며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 특히 김순원 세력은 성덕왕의 첫 번째 왕비, 중경과 수충 두 아들을 낳은 성정 왕후를 내몰고, 자신의 딸을 두 번째 왕비 소덕 왕후로 간택하게 했다, 김순원은 또 효성왕의 첫 번째 왕비를 몰아내고 두 번째 혜명 왕후를 맞이하게 했다. 그러나 효성왕은 혜명 왕후를 멀리하면서 다시 세 번째 부인으로 박영종의 딸을 맞아들였다. 효성왕이 영종의 딸, 후비를 총애하자 혜명 왕후와 그의 아비 김순원 세력이 이를 마땅치 않게 여겨 후비를 죽이려 했다. 이를 알아차린 효성왕과 영종의 세력이 결탁해 김순원의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김순원의 세력이 워낙 두텁게 형성돼 궁궐 내외에서 정보망을 가지고, 왕과 영종의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해 오히려 왕의 측근들이 궤멸되고, 효성왕도 즉위 6년 만에 죽음을 맞았다. 끝내 효성왕은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았고, ‘효를 이루었다’는 효성왕이라는 굴욕적인 묘호를 얻었다. 효성왕은 세 명의 부인을 맞았지만 아들이 없었다. 아들을 두기가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해야 정확한 말이다. 귀족들의 세력싸움 틈바구니에서 왕비 누구도 아들을 편안하게 낳을 수 없었던 환경이다. 효성왕은 일찌감치 이러한 권력구도 속에서 동생 헌영을 태자로 책봉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하기를 바랐다. 효성왕은 왕이 되기 이전부터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던 신충을 늦게 측근으로 불러들여 그에게 경덕왕대까지 왕권강화를 위한 제도를 만들어주기를 당부했다. 효성왕이 치열한 권력다툼 과정에서 죽음을 맞고 동생 헌영이 35대 경덕왕으로 즉위했다. 경덕왕은 즉위하면서부터 김순원 세력을 비롯한 귀족세력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치기 위해 개혁을 추진했다. ◆경덕왕의 업적경덕왕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 성덕왕과 형 효성왕이 귀족들의 세력다툼에 밀려 제대로 나라살림을 꾸려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지켜보았다. 경덕왕은 형의 친구였던 신충과 함께 왕권 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식 정치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태자 신분에 있으면서부터 꾸준히 정치를 공부했다. 경덕왕이 즉위하면서 처음에는 유학사상에 입각한 당나라 정치를 모델로 삼아 전제왕권 정치를 펼치려 했다.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 경덕왕의 개혁정치는 처음부터 귀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왕의 정치가 귀족들의 반대로 우왕좌왕하면서 백성들의 삶도 평탄하지 못했다.재위 2년째인 743년에는 지진이 일어나는 등의 천재지변도 다양하게 일어나자 귀족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왕의 부덕함을 탓했다. 또 745년에는 달걀만한 우박이 떨어지고, 가뭄이 계속되면서 흉년이 이어졌다. 큰 별똥별이 떨어지고, 가뭄에다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747년에는 태풍이 불어 나무가 뿌리째 뽑히기도 하고, 가뭄이 들고 메뚜기떼가 들판을 가득 메우기도 했다. 이러한 자연적인 재해조차 왕의 부덕함이라 비난하며 김사인이 경덕왕을 비판하며 몰아세웠다. 그러다 김사인이 병으로 사직하자, 왕은 신충을 상대등으로 삼아 다시 제도개혁을 밀어붙였다. 경덕왕은 지방관리들의 월급제를 폐지하고 녹읍을 지급해 관리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그들의 충성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중앙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왕권강화에 서서히 시동을 걸었다. 경덕왕은 사벌주를 상주로 고치고 1주 10군 10현을 예속시켰다. 이어 상량주를 양주로 고치고, 청주는 강주, 한산주는 한주, 수악주는 삭주, 웅천주는 웅주, 하서주는 명주, 완산주는 전주, 무진주는 무주 등 전국 9주를 모두 이름을 바꾸고 행정조직을 간소화 시켰다. 삼국통일 이후 정비하지 못했던 행정구역을 새롭게 정비했다. 주요 직분을 가진 관리는 물론 하위관리들까지 60일 이상 휴가를 쓰면 해직하는 교시를 내려 관료들의 기강을 다잡아 중앙권력이 지방까지 바로 미칠 수 있도록 체계를 가다듬었다. 중앙의 관제도 업무 성격에 맞게 이름을 모두 고치고, 의술과 율령 등의 전문적인 분야에는 전문지식을 가진 인물을 선발 임명해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관리들이 본분에 충실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경덕왕은 외교관계도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당과는 직제를 그대로 본받으면서 두텁게 교류하고, 왜와는 아버지 성덕왕 때 침략해온 것을 두고 분노하며, 철저하게 경계하면서 선을 그었다. 왜에서 수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왔지만 만나주지도 않았다. 경덕왕은 내부적인 조직정비와 함께 백성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안정시켜 편안한 사회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대중불교를 확산하는 작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성덕대왕신종을 주조하게 하는 한편 전국에 정기적으로 대종을 울려 심리적인 안정감을 심어주려 했다. 경덕왕의 대중불교를 전파하는 가장 핵심적인 노력은 불국사와 석굴암 건설이다. 천년이 지나도록 사상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꼽히는 불상을 제작하고, 건축물 또한 예술성과 과학기술을 접목해 지금도 화려한 예술적 작품으로 남아 국보급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경덕왕은 귀족들의 자녀는 물론 지방의 귀족 자녀들까지 중국으로 대대적으로 유학 보내고, 돌아오면 중용하는 제도를 채택해 인재 육성에도 상당히 노력했다.어느 정도 체제가 정비되자 경덕왕은 풍악을 즐기며 느슨한 모습을 보였다. 이때 재상의 자리에 있다가 물러났던 충신 이순이 왕이 풍악을 즐긴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와 “중국의 걸주가 주색에 빠져 횡음을 일삼다가 정사가 문란해지고 결국 나라가 망했다”며 풍악을 경계할 것을 충고했다. 경덕왕은 이순의 충고를 받아들여 스스로 반성하며 풍악을 물리치고, 이순의 강의를 청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과 우주의 이치에 대한 공부를 하면서 말년까지 백성을 위한 정치에 노력을 기울였다. ◆경덕왕의 정치경덕왕은 어릴 때부터 안전하고 건강한 나라, 행복하고 평화로운 날들을 이어가는 백성들의 삶을 최고의 정치목표로 삼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경덕왕은 바둑의 귀재이자 제갈량의 지혜를 가졌으면서 1대 1의 상황에서는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을 무위를 가진 난세를 타개해나가는데 관리로서는 최고의 덕목을 가진 신충을 정치의 스승으로 삼았다. 경덕왕은 의지가 강할 뿐 아니라 현자와 덕을 가진 고승 등의 인물들로부터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지도자였다.한 번 하고자 하는 일은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내고 성취하고야 마는 집념을 가졌으면서도 타협과 양보의 겸양을 지진 경덕왕은 지혜를 발휘해 귀족들의 세력다툼을 교묘하게 이용해 국력을 기르는 힘으로 전환시켜 활용했다. 귀족들의 자녀들을 중국으로 유학하게 하고, 우수한 인재가 되어 돌아온 귀족들의 자녀는 중요한 일을 맡겨 성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자연스럽게 귀족들이 세력다툼에서 왕의 편에 서기 시작했다. 경덕왕의 이러한 귀족세력 편가름과 활용정책은 모두 신충의 머리에서 나온 책략이었다. 적당한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벼슬을 내리고, 자녀들을 중하게 쓰면서 자녀들의 안정적인 성장을 위해 왕가에 호의적인 반응을 하도록 유도하는 전략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경덕왕의 정치는 중앙과 지방을 잇는 통로를 원활하게 하고, 백성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나랏일에 참여하게 했다. 귀족들은 어느새 앞다퉈 충신이 되려고 경쟁했다. 왕권을 견제하는 귀족세력은 자취를 감추었다.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귀족들의 세력을 평준화 하여 서로 협력하는 체제로 전환하게 하고, 백성들이 서로 믿고 화합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자 신충은 경덕왕에게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을 지어 기도하겠다며 물러났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경덕왕은 아들을 낳아 왕위를 잇게 하고 싶었다. 그는 천궁을 드나드는 표훈 대사를 통해 천제에게 아들을 점지해 주도록 부탁했다. 그리고는 가끔씩 풍악을 울리며 늘어져 낮잠을 자면서 일탈을 즐기기도 하는 왕으로 이름을 남겼다. *신라사람들의 내용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