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이라서 한파가 몰아쳐야 할 즈음이지만 날씨는 마치 봄 같다. 연일 15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이 며칠째 이어지면서 말라야 할 풀들을 오히려 푸르러지고 나무에서 새순도 돋아나고 떨어져야 할 잎들도 그대로 있다. 잔디 사이로 자라는 토끼풀은 마치 제철을 만난 듯 푸르기만 하다. 그냥 사는 데에는 이만한 날씨도 없지만 사계절이 뚜렷하고 특히 겨울에는 추워야 하는 환경에 적응해 있는 식물들은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환경일 것이다. 겨울이 되면 나무들은 꽃눈을 감추고 겨울잠을 자면서 쉬어야 하는데 따스한 날씨에 꽃눈은 자꾸만 부풀려 하고 잎들도 나가야 할 때를 몰라 몸살을 앓을 것이다. 겨울에 충분히 쉬지 못한 나무들이 봄이 되면 어떤 반란을 일으킬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가끔씩 오랫동안 산을 올려다 볼 때가 있다. 사계절 내내 바람은 산으로 불어왔고, 나무들이 먼저 비를 품었고, 눈이 올 때는 몸을 낮춘 채 때를 기다렸다. 산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있는 것 같지만 오랫동안 산과 함께 살다 보면 있어야 할 자리에 산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적당히 물을 품어야 하거나, 적당히 바람을 걸러야 할 때를 짐작하고, 심지어 달이 뜰 때도 산이 거기 있어서 달은 더 아름답다. 그 산에 있는 나무는 겨울이면 겨울잠을 잔다. 그래서 산은 고요하다. 산에는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짐승들이 길을 만들어 먹이를 구하러 다니지만 산은 속으로만 우렁우렁 소리를 낼뿐 고요하다. 그 고요한 산에서 나무들은 겨울잠을 자고 싹을 갈무리하고 열매를 비축한다. 그 아름다운 순환의 법칙이 대지를 거스르며 일어날 때 산의 질서는 흐트러진다. 나무가 울고 풀이 일어선다.이상의 징후는 언제나 있어 왔다. 쉬어야 할 때 쉬지 못하는 나무들, 속으로 침잠하지 못하고 방해를 받는 나무들은 때가 되면 모습을 드러낸다. 농부들은 나무가 겨울에 쉬는 것을 알지 못하고 겨울에 들어서면서 가지를 잘랐다. 뿌리 가까이에서 기계를 돌렸고 남보다 좀 더 빨리 자기의 나무에서 봄이 닿기를 기원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무는 시달림을 겪어야 했다. 가만히 쉬는 것, 가만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 어려웠다.먼 대양에서는 엘니뇨 현상이 일어나면서 바다가 끓는다. 도시에서는 자동차가 다니고 공장에서는 매연이 쉬지 않고 하늘을 향해 피어올랐다. 심지어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도록 깊은 밤에 연기를 내뿜기도 했다.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 생존했지만 자연을 속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바닥 끓으면서 대지도 함께 끓어오르고 계절은 순서도 없이 닥치는대로 다가오는 것이다.겨울이어도 늘 파란 채소들이 있던 남해도 아닌데 우리집 텃밭엔 새로 새파란 잡초가 자라기 시작했다. 가을에 심은 상추와 배추는 아직 얼지도 않고 새파랗다. 별다른 겨울 채비를 하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이 싱싱한 채소들이 좋지만 한편으로 두려움이 생기는 것은 겨울답지 않은 겨울, 평소 같지 않은 일들 때문이다. ‘답게’라는 말, 평소와 다름 없이 늘 그대로인 삶은 안온한 법인데 이렇게 법칙을 거스르는 일들이 반갑지만 않은 것은 닥쳐올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산이 가라사대, 여여한 그대로, 변함없이, 늘 그대로 있어서 좋은 것이라 하였는데 세상은 날마다 변한다. 변하는 것이 세상이라고도 하지만 엘니뇨 현상이 몰고 오는 이 따스한 겨울의 끝에 뭐가 닿을지 작은 두려움도 함께 온다. 사과나무 이파리들이 모두 떨어지고 나무들이 깊은 겨울잠을 잤으면 좋겠다. 산의 낙엽송들도 모두 이파리를 떨구고 깊은 잠에 들기를, 그래서 다시 한번 산이 가라사대, 우리는 모두 쉬고 있으면 좋겠다. 천영애 (시인) 김광재 기자 kjk@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