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성리학자의 삶 살다 위기에 빠진 국가 위해 헌신||20세 남명 문하에서 수학…임란때 의병 일으켜 왜병 기습 공격, 연강전투 승리 견인||송암공 묘소·신도비·도암서원 등 경북 기념물 지정
고령이 대가야의 옛 땅임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령에는 대가야의 문화유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긴 역사 속에서 고령 땅의 선조들도 수많은 문화재를 남겨 두었다. 이번에는 그 중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 한 곳을 탐방하려 한다. 고령군 쌍림면 소재 김면장군 유적(경상북도 기념물)이 그것이다.김면장군 유적을 찾아가는 길은 쌍림의 특산물 딸기를 재배하는 비닐 하우스가 좌우로 펼쳐져 있어 마치 흰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가로질러 가는 느낌을 준다. 포실한 삶이 연상되는 풍경이다. 하긴 조선 후기의 이중환(李重煥:1690~1752)은 명저 ‘택리지(擇里志)’에서 “세 고을(성주·고령·합천)의 논은 영남에서 가장 비옥해서 파종을 적게 해도 곡식을 많이 수확한다. 그러므로 대대로 이 땅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살림이 넉넉해서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이가 없었다”라고 유족(裕足)했던 고령사람의 생활상을 기록으로 남긴 바 있었다.조선시대 이런 풍족한 경제적 토대가 갖춰진 지역에는 으레 사회 지배층인 양반들이 모여 들기 마련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거주하는 향촌에서 언젠가 중앙 관계로 진출할 것을 꿈꾸며 열심히 독서하고 학문에 침잠하면서 탄탄한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향촌의 유력자로 군림하였다. 이들을 ‘재지사족(在地士族)’이라고 부른다. 오늘 탐방할 주인공 김면장군 또한 고령의 재지사족 출신이었다. ◆송암 김면장군의 삶김면(金沔:1541~1593)장군은 고령김씨로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이다. 아버지는 경원부사를 지낸 김세문(金世文)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 예빈시 판관 김중손(金仲孫)의 딸이다. 공은 10세부터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를 왕래했던 낙천 배신(裵紳;1520~1573)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20세가 되던 1560년(명종 15)부터는 남명을 찾아가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를 계기로 동문인 성주의 한강 정구(鄭逑;1543~1620)와 긴밀한 교유관계를 맺게 된다. 24세에는 산청 덕산의 산천재로 스승 남명을 찾아가 문중 재실의 상량문을 받았는데, 이듬해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 재실을 친히 방문한 남명이 송암재(松菴齋)라는 재사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에 감명받은 공은 송암을 자신의 호로 삼아 스승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였다.이렇게 남명으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은 송암공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실천하여 명성이 높아져 1577년(선조 10)에는 월천 조목·우계 성혼·한강 정구 등과 함께 유현(儒賢)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공조좌랑을 제수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무렵 고을 사람들은 공의 훈도를 받아 서로 경계하여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았고, 만약 그랬을 경우 송암 선생이 그것을 알게될까 두려워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렇듯 1592년(선조 25)까지 송암공은 관직을 탐하지 않는 올곧은 성리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가 상평록일기(常平錄日記), 삼강략(三綱略), 심유지(心遺誌), 역리지(易理誌), 봉선의(奉先儀), 율례지(律禮誌)’ 등 주로 성리학 관련 저술을 남겼던 데서 이를 쉽게 알 수 있다.그러나 송암공의 선비로서의 삶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이 침략해 오자 나라를 구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삶으로 바뀌었다. 2년여에 걸쳐 의병장(義兵都大將)으로서 왜적과의 전투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과로와 병환으로 53세에 순국하기에 앞서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가 있는 줄은 알아도, 내 몸이 있음은 몰랐구나(只知有國 不知有身)”. 참으로 일신을 돌보지 않고 한 몸을 오롯이 나라와 임금을 위해 바쳤던 충신의 적심(赤心)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후손들은 이 말을 새긴 어록비를 만들어 서원 앞에 세워두었다. ◆송암의 임진왜란 의병 활동송암공은 본래 성리학자이자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였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를 ‘장군’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동문인 망우당 곽재우(郭再祐;1552~1617)를 ‘홍의장군’이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학자보다는 위기에 빠진 국가를 위해 의병을 일으켜 헌신했던 행적이 훨씬 가치있는 삶이라고 여겼던 민초들의 생각이 반영된 칭호이다.김면장군의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에 대해서는 약간의 사료가 남아 있는데, ‘송암선생실기’와 ‘송암선생유고’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두 책은 모두 약 180년이 지난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것으로 다소 부정확한 서술이 포함되어 있다. 다행히 거창 사람으로 장군의 휘하에서 함께 의병항쟁에 참여했던 모계 문위(文緯;1555~1632)의 ‘모계선생일기’와 정경운의 ‘고대일록(高臺日錄)’ 등 일기류가 남아 있어 장군의 의병활동을 비교적 소상하게 복원할 수 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적들은 동래성을 함락한 후 세 갈래로 나눠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김면장군이 살았던 고령지역은 왜적의 서쪽 진격로인 서로(西路; 동래-김해-창녕-현풍-성주-김산-추풍령-영동-청주-한양)에 인접한 곳으로 4월 말에는 전쟁의 여파가 미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장군은 가동(家僮)과 종족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진은 거병 직후 낙동강을 따라 북으로 진군하는 소수의 왜병을 기습 공격한 연강전투에서 승리를 맛보았으나, 소수의 병력이 가진 한계를 절감하고 5월 초 거창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거기서 내암 정인홍・곽준・문위・권양 등과 함께 거의를 약속하고 기병유사(起兵有司)를 정하는 한편 여러 고을에 통문을 돌려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4~5일 사이에 무려 2천여 명의 군사가 의병으로 참여하였다. 장군의 의병진이 적과 본격적으로 교전한 것은 6월 9~10일의 개산포전투였다. 5월에 한양을 점령한 왜적은 궁궐을 노략질하여 차지한 진귀한 보물들을 일본으로 보내려고 하였다. 그 약탈물을 실은 배가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장군의 의병진이 개산포에서 요격하여 왜적 3명의 목을 베고 전함 1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때 회수한 보물 중에는 세종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금비녀도 있었다고 한다.당시 경상도에는 서부 경남과 호남 진출을 목표로 왜군 10만이 모리테루모토(毛利輝元)의 지휘 아래 지례·개령·김산 등 현재의 김천시 일원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김면, 곽재우, 정인홍 등의 의병부대는 낙동강을 차단하여 적들이 운송로로 이용하는 것을 막고 경상우도로의 진공을 저지하려고 했다. 김면장군은 6월 중순 거창과 김천의 경계지점인 우현전투에서 승리하였고, 7월에는 거창 진출의 길목인 지례의 장곡역전투에서 다시 대승을 거두었다. 7월29일부터 8월1일까지의 지례전투에서는 종래의 방어 위주 전술에서 벗어나 공격전에 나서 500여 명의 적군을 화공으로 전멸시키고 지례를 수복하여 적들의 진공 계획을 무산시켰다. 8월에는 정인홍과 연합작전으로 성주목을 탕환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적세가 워낙 강한데다가 개령의 왜병 2천까지 원군으로 합세하여 장군의 의병부대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하였다. 그 후 지례의 사랑암전투, 개령 방해현전투 등에서 승리했지만, 이어진 개령과 성주 전투에서는 대패하였다. 1593년 정월에 전공을 보고받은 조정에서 교서를 내려 장군을 의병도대장에 임명하였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분기점으로 삼아 장군의 활동을 이전을 제1기 의병활동기, 이후를 제2기 의병활동기로 나누고 있다. 이때부터 장군의 활동 범위가 경상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활동내용도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여러 의병부대에 대한 순시나 거시적인 관점의 작전 계획 수립 등으로 변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은 관병과 의병을 동원하여 개령·성주·선산지역의 적들을 매복작전으로 방어하고 때로는 기습 공격으로 상당한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해 3월 명군의 참전으로 남하하던 왜적들이 선산에 집결하고, 상주에 주둔하던 왜병들까지 합세하자 장군은 이들을 공격하고자 다시 김산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그러나 오랜 기간 전장을 누비면서 과로가 쌓인 데다가 병마까지 겹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하였다. 향년 53세였다. ◆유적 둘러보기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된 김면장군 유적은 송암공의 묘소, 신도비, 사당인 도암사(道巖祠), 강학시설인 도암서당과 복원한 도암서원 등을 포괄하는 사적지이다. 공의 순국 후에 조성된 각종 추모시설로서 일종의 종합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구역은 그리 넓지 않지만 이곳저곳 둘러볼만한 곳이 여럿 있다. 먼저 서원의 왼쪽 나지막한 구릉 위에 있는 묘소와 신도비부터 찾아간다. 묘소는 2000년 성산면 박곡에서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새로 조성하였다. 높다란 봉분이 위엄있게 좌정했는데 그 앞에는 상석, 묘표석, 석등, 문인석과 망주석 등 석물이 좌우로 늘어서 있다. 그 중에는 묘표석이 특히 눈에 띄는데, 조선 중기의 형식이 남아 있어 고태미(古態美)를 풍기고 있다. 묘소 앞에는 원래 번암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찬술한 신도비가 비각 안에 서 있었다. 현재는 낡은 비각을 중수하는 중이어서 비석은 빈 터에 방수포를 씌워 눕혀 놓았다. 묘소를 내려와 도암서원을 둘러본다. 계단을 올라 지지문(知止門)이라고 편액된 외삼문을 지나면 2층 문루가 문득 길을 막는다. 2층 문루인 상평루(常平樓) 아래를 지나면 정면에 도암서원 강당이 보인다.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 지붕을 가진 당당한 건물이다. 강당 좌우 전면에는 동서재(경묵재・수의재)가 서 있다. 강학공간이 분명하지만 현실적으로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당의 후방에는 공의 위패를 모신 도암사와 원래의 강학시설이었던 도암서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유적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둘러본 도암서원은 2002년 복원된 것으로 그동안 적잖은 변천을 겪었다. 도암서원의 뿌리는 1666년(현종 7) 대가야읍 연조리에 건립된 도암사라는 사우였다. 그곳에서 공에 대한 향사가 이루어지다가 1789년(정조 13)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도암서원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03년 문중의 노력으로 도암사 왼쪽에 도암서당을 지었고, 1975년 재실로서 도암재를 건립하였다. 이 도암재를 2002년 도암서원으로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조(顯祖)를 선양하려는 후손들의 애틋한 충정이 느껴지는 대목이다.서원 앞에 세워진 어록비의 구절을 거듭 음미하며 유적을 떠난다. 늙은 배롱나무 두 그루가 붉은 꽃망울을 만개할 7·8월에 다시 찾겠다는 다짐과 함께.이문기(경북대 역사교육과 명예교수) 문정화 기자 moonjh@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