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가슴에 깊이 남아있는 글이나 책들이 있다. 의과대학에서 의료인문학을 가르치게 되었을 때, 처음 접하였던 스캇 펙(Scott Peck)박사의 “아직도 가야할 길”의 많은 부분들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있고, 의과대학 학생들과의 나누었던 대화들이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어릴 때에 동화에서 보았던 ‘신데렐라’나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처럼, 누군가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나의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줄 것이라는 기대감과 희망이 무의식속에 있다. 실제로 결혼을 하게 되면 그런 동화 속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학생들과 소그룹 수업을 하면서 나누고 전체 임산부의 20%에서 산후 우울증이 온다고 설명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습을 본다. 이 때에 하버드 의대의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성숙할 수 있도록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이라 말해주고 예화를 들어주면 많은 학생들이 고개를 끄떡이기도 한다. 그리고 훌륭한 교사나 치유자가 되는 좋은 길은 환자나 학생보다 한 발짝만 앞서는 것이다. 한 발짝 앞서 있지 않으면 이들을 어디로도 인도할 수 없다. 하지만 두 발짝 앞서 있으면 이들을 잃기 쉽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환자와의 소통이 중요하고, 긍정적인 관계(rapport)를 형성하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의사의 길이라고 설명하곤 하였다.길에 대한 시 중에는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로 시작하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많은 사람들이 외우고 있지만, 나에게는 정년퇴임을 하면서 인용하였던 윤동주 시인의 ‘새로운 길’이 깊은 감동과 용기로 다가왔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언덕을 넘어 마을로 가는 길은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길이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길이다.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이는 그 길은 언제나 나에게는 새로운 길이 된다고 노래하였다.소아신경학을 전공하면서 희귀한 질환과 발달지연이 있는 환아들을 평생 진료하였지만, 다양한 원인에 의하여 발달이 지연되어 있는 이들에게 최적의 치료 시기에 가장 적절한 치료를 시행할 수 있는 독일의 사회아동발달센터와 유사한 모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정년퇴임 후 개원을 하게 되었고, 그 길은 정말 새로운 길이었다. 내가 전공하였던 뇌전증, 두통, 발달 지연이 있는 환아를 보는 외에도 독감 환자에서부터 영유아검진과 예방접종까지, 이전에 근무하였던 동산병원에서는 직접 하지 않았던 많은 일들을 혼자서 해나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린 아이들과 청소년 환아를 보는 것이 또한 새롭고 즐거운 일이 되었다. 영유아검진을 하면서 부모의 온갖 질문에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직원들은 환아가 밀린다고 눈치를 주기도 한다. 예방접종을 하면서 마음에 준비할 시간을 달라고 사정하는 꼬마 친구들을 설득하고 기다리면서 그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나오고, 가지고 있는 손수건으로 주사 후 울고 있는 아이들의 눈물을 닦으며 달래는 모습은 이전에 상상도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대구경북권이 아닌 타 지역에서도 어린아이가 발달이 지연되거나, 경련으로 잠 못 이루며 염려하는 부모님들이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고민하며 길을 찾아가는 하루하루가 나에게는 새로운 길이 되었다.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비롯한 발달지연이 있는 아이들이 30만명 이상으로 조기 진단과 조기 치료가 아주 중요한데, 병원에서의 치료가 우리나라 의료보험에서는 인정되지 않는다. 실손보험에 의해 도움을 받지만, 이마저도 보험회사의 사정에 의하여 진료비 지급 거부로 발달지연이 있는 아이를 둔 부모는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혼자 짊어져야하는 경우가 많다.이러한 현상이 저출산의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할 것이다. 발달지연이 있는 아동의 가정이 그 모든 짐을 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발달지연이 있는 아이와 가정을 돕는 길이 제도권 안으로 들어와 한 곳에서 해결되는 독일의 아동발달센터 방식으로 나아가는 작은 한걸음 한걸음이, 2024년 새해에 나에게는 윤동주 시인의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새로운 길' 임을 다짐하게 된다.김준식(제이에스소아청소년과 원장, 계명대학교 명예교수)김광재 기자 kjk@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