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한국에서 개봉한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신작 ‘리코리쉬 피자’는 기성세대에게 도구처럼 이용당하며 부유하는 청년들을 보여준다. 그 영화에서 청년들은 주류와 비주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그저 생존한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 미국 산 페르난도 벨리이지만, 그 당시를 상징하는 주류적 시대상을 거세한다. 영화적 현실 안에는 베트남전도, 뉴 할리우드 시네마도 잘 보이지 않는다. 유일하게 언급되는 사회적 사건은 ‘미국 대통령도 어찌하지 못하는’ 오일 쇼크 정도이다. 그렇다고 주류에 대항하는 반문화에 주목하지도 않았다. 반전운동, 여성운동, 마약, 히피 등의 비주류도 영화의 핵심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그 모든 사회적 사건은 인물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영화 주인공이 상징하는 소시민적 청년의 삶에는 큰 역사적 사건보다, 내던져진 현실이 더 가깝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는 것이 서민 대부분의 삶일 것이다.지난 9일, 최고의 주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이 결과로 누군가는 희망을 보고, 누군가는 절망을 맛봤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은 그 자체로 해답이거나 끝장은 아니다. 이 큰 정치 이벤트가 끝나고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그리고 개인의 정치도 계속된다. 누가 대통령인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대통령 한 명이 내 삶을 책임지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복잡성은 계속 증대되고 있다. 글로벌 사회는 국가 단위를 넘어선 경제, 환경 변화를 경험하게 하고, 초연결사회는 어느 사회적, 과학 기술적 요소가 나에게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 이는 자연히 국가 권력, 대통령의 영향력이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뉴스에서 보도하는 사건들을 볼 때 그것이 내 삶과 상관없다고 느끼거나, 왜 나의 이야기를 대변하는 뉴스는 만들어지지 않는지 생각할 때가 있지 않은가? 개개인에게 초점을 맞춰주는 정치적 요구가 더 늘어나고 있다.이러한 사회 변화는 지난 대선에서 생활밀착형 공약의 범람으로도 읽을 수 있었다. 윤석열 당선자는 ‘석열 씨의 심쿵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전기차 충전요금 동결, 반려동물 쉼터 확대 등의 공약을, 이재명 후보는 ‘소확행 공약’이라는 이름으로 탈모약 건보 적용, 청년면접 서비스 등을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거대 담론만으로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려워졌다. 복잡해진 사회 구조로 인해 각자의 인생에서 부딪히는 현안들이 피부에 와닿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정치는 대통령, 국회의원, 기업인 등 큰 주체들만의 판이 아니다. 이제는 정치 주체로서 개인이 더 중요한 시대로 거듭나고 있다. 사회가 커지는 만큼 정치는 세분된다. 큰 사회적 흐름만 바라보기에는 우리의 삶이 소중하다. 정치인만 바라보는 정치는 공허하다.결국 나의 동네, 나의 직장이나 학교, 내가 관심 있는 분야 등 내 삶의 영역 안에서의 정치가 중요하다. 정치란 우리의 삶과 분리돼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정치적 행위가 될 수 있고, 우리가 있는 모든 곳은 정치적 공간이 될 수 있다. 리코리쉬 피자의 주인공들은 현실에 저항하지는 않지만, 그들 나름의 삶을 꾸려간다. 창업하고, 오디션을 보고, 선거 캠프에 참여하며, 서로 사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내 삶을 꾸려가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정치가 필요한 때다. 당장 다가오는 6월1일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역을 바꿀 수 있는, 작은 정치를 펼칠 좋은 기회다. 그리고 수많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내 눈에 보이는 불합리한 일에 항의할 수도 있고, 내 방안에서 환경 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실천할 수도 있다. 우리는 여전히 밥 먹고, 일하고, 관계 맺으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을 맡겨 놓을 수만은 없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고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씩 개인맞춤형 정치를 꾸려보는 것이 어떨까.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