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현공증인변호사이번에는 ‘투표시간의 연장’과 ‘투표일의 유급공휴일화’ 문제가 대선의 주요 의제로 등장하였다. 야권과 시민단체는 시민 참정권의 실질적 확대를 위하여 이에 찬성하고, 새누리당과 보수단체는 ‘투표는 단지 성의의 문제’, ‘추가비용 대비 투표율제고 효과의 불분명’, ‘야권과 결탁된 음모’ 등을 내세워 이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새누리당과 보수단체의 반대이유 중 최소한 전 2자는 사실과 다르다. 그간의 많은 조사결과에 의하면, 투표하지 않은 사람 중 50% 이상(그 대부분은 투표일에도 정상 근무하는 중소기업 회사원, 비정규직 노동자, 일용직 노동자, 외지근로자들이라고 한다)이 생계와 근무로 시간상·경제상 불가능 혹은 곤란하여 투표하지 못했다고 하고, 외국사례와 국내경험에 비추어 보면 투표 시간을 2시간만 늘려도 투표율이 최소 5~10% 정도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심지어 이전의 한나라당 소속 일부 의원들과 보수단체조차 급감하는 투표율의 제고를 위해 투표시간 연장을 주장하기도 했다.시민의 참정권의 실질적 평등보장과 적극적 정치참여의 독려라는 대의명분에 밀려, 새누리당과 보수단체는 그 반대이유를 에둘러 표현하고 있으나, 이들이 투표시간 연장 등에 반대하는 실제적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와 유사한 행태는 지금의 우리 보수세력만의 정치적 꼼수가 아니라, 지배적 보수세력 일반의 계급적·정치적 본질에서 유래하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말 민주주의 확립 이전의 전제정치 시대는 정치적 지배세력과 사회적 가치를 전유하는 보수계급에게, 피지배 인민의 정치참여, 인민에 의한 정치는 지배질서에 대한 근본적 부정으로 철저한 탄압의 대상이었다. 1세기여 전에 보통선거권의 민주주의가 확립된 이후에도 피지배 인민의 정치참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달라지지 않는다. 인민의 정치참여는 직접이 아닌 엘리트에 의한 대의에 의하여만 하고, 인민의 정치적 권리는 경쟁하는 정치엘리트중 하나를 선택하는 투표행위로 한정되고,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정치적 의제마저 지배질서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도록 현대 민주주의가 주조됐다. 또한 인민들의 정치참여의 권리는 이처럼 형식적으로, 내용적으로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투표행위로 축소된 권리마저 사실상 포기하도록 강제되거나 은유된 경우가 허다했다.예컨대 현대 민주주의의 특징을 가장 탁월하게 표현한 슘페터(Schumpeter)는 “우리는 인민이란 용어 대신에 오합지졸(the rabble)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며,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그들의 죄악성, 우둔함과 싸워야”하고, “민주주의는 단지 인민이, 그들을 지배할 예정인 사람들을 승인 혹은 부인할 기회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할 뿐”이라고 하였고,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지배적 정치철학이었던 다원주의(Pluralism)자들은 인민의 정치적 무관심이나 정치참여의 결핍은 “지배질서에 대한 신뢰를 반영”하거나 “건강한 민주주의의 다른 표현”이라고까지 했다. 결국 현재의 민주주의 하에서도, 지배계급과 보수세력은 자신들의 지배질서에 정당성을 부여할 만큼의 시민 동의만을 허용할 뿐, 그 이상 시민의 정치적 각성이나 적극적 정치참여는 물리적으로 억압하고, 반대로 시민의 정치적 무관심과 불참여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추기거나 최소한 이를 제도적으로 방치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루소(Rousseau)의 말처럼 투표하는 하루만의 자유를 가진 우리는, 슘페터가 추가하는 것처럼 그것마저 지배질서의 헤게모니에 포획된 경쟁 엘리트 중에 하나만의 선택으로 축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1일의 표피적 선택의 자유마저, 사회경제적 약자들로 하여금 시간상, 경제상의 한계로 사실상 포기하도록 강제한다면, 또한 지금의 집권세력처럼 이런 구조적 모순을 단지 효율의 문제로 외면하고 심지어 그들의 무성의로 왜곡 비난 받는다면, 진보·보수를 떠나 우리의 민주주의는 절대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약자들의 정치참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독려하기 위하여 민회에 참여하는 경우 수당까지 준, 2천500여년전의 그리스인들의 정치의 본질과 미래에 대한 통찰에 감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