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포스 앞에서/하수미

나아갈 수도, 피할 수도,/뛰어넘을 수도 없는/굴포스/그곳에선 걸음을 멈춰야 한다//옷깃에 촉촉이 내려앉은/살아낸 시간들//저기,/떨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한 치의 머뭇거림 절벽 위엔 없는데//왜 이리 부끄러운가/주저했던 그 시간이//다가올 시간이 노쇠할까 두려우면/굴포스를 감싼 물구름을 바라보라//추락이 만든 시간길도/황금빛으로 물든다「다층」(2020, 여름호)하수미 시인은 경남 마산 출생으로 2019년 시조시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삶 속에서 이따금 여행이 이뤄진다. 여행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만든다. 더구나 예술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여행은 늘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여행지에서 얻은 시상은 시로 생산되기가 쉽지 않지만 ‘굴포스 앞에서’는 그것을 뛰어넘은 좋은 기행시다. Gullfoss는 황금빛 폭포라는 뜻을 가진 아이슬란드에 있는 폭포다. 폭포 앞에서 시의 화자는 감격적인 순간을 맞이하면서 그 소회를 세 수의 시조로 담고 있다. 이 시조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중심 뼈대와 같은 구실을 하는 시어로 시간이 주목된다. 각 수에서 한 번씩 쓰인 것으로 볼 때 화자는 굴포스라는 폭포 앞에서 제한된 시공간 속의 존재인 자아를 마음 속 깊이 보듬어 본 듯하다. 누구든지 한계를 안고 살아가고 있으니 자연의 위용을 우러러보는 중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생각하며, 더 열정적으로 살아가야 하겠다는 다짐의 시간을 가질 만도 하다. 그래서 나아갈 수도 피할 수도 뛰어넘을 수도 없는 굴포스 그곳에서는 걸음을 멈춰야 한다, 라고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실로 다른 도리가 없다. 옷깃에 촉촉이 내려앉은 살아낸 시간을 살피면서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화자는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한 치의 머뭇거림이 절벽 위에 없는 것을 보면서 왜 이리 부끄러운가 하고 주저했던 시간을 떠올린다. 이어서 다가올 시간이 노쇠할까 두려우면 굴포스를 감싼 물구름을 바라보라, 라고 강권한다. 그 순간 모든 이들은 눈길을 물구름 쪽으로 향할 것이다. 추락이 만든 시간길도 황금빛으로 물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인생살이가 꼭 슬픔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자각에 이르지 않았을까. 시간의 길 위를 무한정 가고 있는 인생의 항로에서 때로 굴포스와 같은 경이적인 풍광과 맞닥뜨릴 때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기대되는 것이다. 기행시도 얼마든지 감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굴포스 앞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인생살이와 잘 접목했기 때문이다.시인은 또한 뜻밖의 정경과 마주한 것을 ‘정원에서’를 통해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때를 놓친 건 게으름이 아니란 걸, 때가 오면 모든 것 걸어야만 한다고 순간에 절명을 알아차린 겨울에 핀 흰 장미 이야기다. 미적 정황 묘사가 돋보인다. 이러한 섬세한 감각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바탕이다. 스케일이 느껴지는 ‘굴포스 앞에서’와 같은 시 세계를 추구하면서 소소한 풍경에서 비롯된 도저한 정신세계를 천착하는 일에도 더욱 힘썼으면 한다. 단시조 ‘밤벚꽃’에서 더 기다릴 수 없어 터뜨린 하얀 꽃잎에 하루 밤새 화들짝 달빛도 놀라는 것을 보면서 한 번에 무너져 내릴 버거운 환희를 떠올리는 감수성이라면 앞으로의 문학적 행보에 기대를 걸어도 좋을 일이다.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때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저자전전에 한동안 떠돌았던 별의 순간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시인에게 별의 순간은 언제인가? 바로 시가 찾아오는 때다. 어떻게 하든지 내 앞의 시, 내 목전에 나타난 시를 놓쳐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한시도 시에서 떠날 수 없는 ‘쓰는 자’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이정환(시조 시인)

먼 북소리/ 윤장근

~ 예술이냐, 사랑이냐 ~…처연한 남도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한녹주의 춤사위가 눈에 아른거린다. 살풀이춤의 부드러운 춤사위가 절절하다. 움직이는 듯 멈추는 듯 들어 올리는 바람결 같은 몸놀림은 일품이다. 스물에 입문하여 이십여 년 동안 민속무를 고수해온 집념의 결실일 것이다. 그녀의 춤엔 신선한 신비감마저 묻어난다. 오묘한 춤사위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하다./ 나는 무용계에 정통한 오규태로부터 한녹주의 내밀한 사연을 듣는 기회를 가졌다. 오규태는 예술성 짙은 고유의 춤 도살풀이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는 한녹주에 관심을 두고서 석운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놨다. 그는 그제야 석운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보남에게서 민속춤을 전수받은 석운은 괴팍하긴 했지만 희대의 명인이었다. 한녹주는 석운의 문하로 들어가서 민속무를 익혀갔다. 장고장단을 익히고 춤을 공부했다. 조금만 잘못해도 장고채로 얻어맞았다. 한해가 가자 요란하게 움직이지 않아도 유연한 춤사위가 풀려나왔다. 그러던 어느 날, 고수 정수관이 나타났다. 그의 북 솜씨는 뛰어났다. 그날부터 그는 석운 도량에서 북을 쳤다. 한녹주는 처음에는 북소리에 관심이 없었으나 점점 애절한 듯 쓸쓸한 북소리에 매료돼갔다. 정수관의 눈빛이 심상찮게 변하자 북소리마저 그녀 마음을 흩트려 놓았다. 그해 가을, 정수관은 석운에게 한녹주와 함께 떠나도록 허락해달라고 부탁했다. 석운은 단호히 거절했다. 정수관은 거듭 간청했으나 스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후, 정수관은 환상적인 북소리만 남긴 채 홀연히 떠나갔다. 한녹주는 정수관과 그 북소리를 잊으려고 춤에 더욱 집중했지만 틈만 나면 그 환영이 비집고 들어왔다. 석운은 그 마음을 읽은 듯 한때의 헛된 마음으로 명인의 길을 그르쳐선 안 된다고 타일렀다. 한녹주는 떠나고자 하는 내면의 소리와 명인의 길을 가야한다는 스승의 당부 사이에서 고뇌하였다. 결국 그녀는 명인의 길을 택했다. 한녹주는 석운에게 삼년을 배운 후 성홍심에게 갔다. 그의 춤은 석운과 또 달랐다. 성홍심에게 한해를 머물면서 한이 담긴 특유의 춤을 완성했다. 스물 셋이었다./ 이윽고 한녹주의 춤에 깃든 사무친 애원성의 근원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혼을 빼고 몸으로만 추는 춤은 춤 시늉일 뿐이다. 창작을 하더라도 내면에서 우러나는 영혼을 춤사위에 실어야 할 터다. 정수관은 살 의욕을 잃고 여기저기 떠돌다 남원에서 죽었다. 진나라 거문고 명인 사광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광은 기녀의 교태에 빠져 현묘한 가락을 잃어버리지만 어리석음을 깨닫고 쑥불로 두 눈을 지져버린 후 마침내 신의 경지에 도달한다는 고사다. 참 유익한 시간이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은 기분이다.…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한녹주는 춤과 사랑의 갈림길에서 고뇌하지만 결국 예술의 길을 택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민속무의 명인으로 우뚝 서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눈물을 흘리며 포기한 사랑이 춤사위 속에 녹아들어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신비롭고 독특한 민속무를 완성한다. 현명한 스승의 결단이 잔인하다. 절절한 북소리의 울림이 춤 명인의 길을 막는다는 두려움에서 두 연인의 사랑을 갈라놓은 셈. 고수와 춤꾼의 기구한 슬픈 사연이 가슴을 저민다. 세월이 지나면 가지 않은 길에 연연해하겠지만 그 어떤 선택도 인간의 미련을 해소해주진 못한다.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온다.오철환(문인)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 최재목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쩌라고/ 너는 너대로 살았잖아/ 그런데 어쩌라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가/ 훨씬 좋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나더러/ 너처럼 살라 하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한 번쯤 막 나가는 삶을/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삶을/ 너는 너처럼/ 나는 나처럼 살자/ 그래도 된다고/ 그렇게 말해야 옳잖아//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 네 멱살을 잡으며/ 그렇게 말하고 싶다/ 너도 나처럼 그렇게 말해도 돼// 좋잖아/ 그게 좋잖아/ 한 대 때려 봐 그래도 돼/ 너는 너처럼/ 나는 나처럼 살 수 있다면/ 한 대 맞아도 돼/ 버림받아도 돼/ 어쩔래/ 그래 어쩌라고「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 (21세기문화원, 2021)자연스럽게 일상어로 툭 던진 말 속에 진리가 담겨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말에 진리가 담겨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런 말은 솔직한 심정을 나타내는 무의식의 모습이긴 하겠지만 깨달음을 줄 정도로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다. 즉흥적인 말이 화두가 되고 인생을 통찰하는 의미 있는 빛과 소금이 되려면 인고의 세월을 거쳐 숙성되고 단련된 영혼의 자유로운 사색이 그 바탕에 깔려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시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는 범상치 않은 기막힌 대듦에 다름 아니다. 오랜 수련에서 나올 수 있는 자신감과 노련한 경륜에서 숨 탄 배짱 거기다 막다른 골목에서 내지르는 순발력 있는 재치가 버무려진 선문답이다. 시인의 대듦은 자신에게 던지는 화두이자 지나온 인생을 농축시킨 엑기스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정도의 내공이 실린 시는 강호의 고수가 아니면 감당하기 힘들다.어떤 분야든지 입문 후 초창기엔 힘든 세월을 보낸다. 청소와 물 긷기, 부엌일은 기본이고 훈련과정도 고되고 험하다. 반면, 스승은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한다. 그 모습을 보는 눈은 불만과 오만으로 차오르게 마련이다. 때 이른 시기에 스승에게 대드는 기회를 잡아 분수를 모르고 건방을 떨다간 된통 당하고 만다. 그건 한 계단 더 딛고 올라서는 발판으로 기능한다. 하산해도 좋은 경지에 도달할 때에야 비로소 정상의 여유를 터득하는 법이다. 그러면 굳이 산에 남을 필요가 없다. 어디에 머물러도 편안하다. 내키는 대로 해도 무리가 없다.마음이 성숙하지 못할 땐 스스로 자제하거나 타의에 의해 통제받는다. 윗사람의 뜻을 따르고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며 아랫사람의 분위기를 살핀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스캔하고 다수 의견에 동조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예각을 숨긴다. 숨을 죽인 채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걷는다. 판이 깨질까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얼음판을 걷듯 몸을 가볍게 한다. 그런 과정에서 경공이 몸에 붙는다. 허나 고수는 거리낌이 없이 내달려도 만사 무탈하다.시인은 이제 ‘막 나가는 삶을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삶을’ 살아도 한 점 어긋남이 없다. 때리면 맞고 버려짐도 감수하겠다는 각오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맞을 일은 없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게 본질이다. 이제 시인은 혜안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 예상을 초월한 시인의 일갈이 사고의 틀을 깬다. 그대는 그렇게 걸었고 나는 나대로 걸었다. 어쩔래. 아무도 대들 리 없는 기막힌 대듦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 앞으로도 그리 살 것이다.오철환(문인)

도리사/ 서원동

도리사 가노라면, 마음에 빈 헛간처럼 헛헛한 그 무엇 있어/ 절 한참 아래 저수지 둑 옆 소의 굽은 잔등 같은 가장자리에 차 멈추고/ 진흙으로 빚은 테라코타처럼 한참을 서 있곤 하지// 가을 햇볕에 잘 익은 바람이 나뭇잎과 풀잎 통해 서성대는 곳/ 공기의 바스락대는 소리까지 또렷하게 보이는 곳/ 해거름이면 본질을 감싸 도는 신비로움이 옹알거리는 곳// 알 수 없는 누군가 그림자 끌며 오갈 듯한/ 저수지 안쪽, 우물처럼 한없이 깊어 보이는/ 잡초 뒤덮인 어둑한 숲속/ 그 속에, 아주 오래전 이 마을 살던/ 할머니가 저수지에 몸 던져/ 동네 사람들이 할마이 저수지라 부르는 이곳/ 그 혼령 떠돈다는 흉한 소문까지 어슬렁거리며 등뼈처럼 버티고 섰지// 저수지는 윗마을에서 흘러내려 오는 개울물 가뒀다가 곧장 아랫마을 농업용수로/ 되돌려주는 곳이라, 사철 엇비슷한 담수를 저장하고 있는 곳 다시 말해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윗마을과 아랫마을이 물의 파이프에 꽂혀 있다네// 하여튼, 그렇게 저수지 주변 거닐며/ 세속에 허물어진 몸 한 번 추스른 뒤/ 연식 오래된 차 시동 걸고 곧 쓰러질 듯 덜컹 삐걱거리며/ 도리사 깔딱 고갯길, 걷듯 느릿느릿 겨우 올라 절 마당 들어서면// 시골 늙으신 어머니가 오랜 타향살이 끝에 모처럼 고향 찾아온 자식 위해/ 부엌 사잇문 열고 슬며시 따스한 한 끼 밥상 내미시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늑함 있어/ 그 아늑함의 맨발바닥 찰바닥거리는 소리 따라가노라면/ 세상 모든 시간들 커다란 빈 항아리 속처럼 깊고 고요해져 환하다「대구문학」 (대구문인협회, 2021. 3)도리사는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화상이 구미 태조산에 세운 천년고찰이다. 복숭아꽃과 오얏꽃은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상스러운 꽃이다. 그래서 도리사(桃李寺)는 극락정토로 가기 위해 기도하는 도량이다. 극락정토를 주재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이 그 중심 가람인 것도 그런 연유이다. 도리사 가는 길의 감회는 남다르다.절 한참 아래에 전개되는 속세는 소의 굽은 잔등처럼 굴곡지고 힘들다. 빈 헛간처럼 헛헛하고 황량한 마음이 발길을 잡는다. 정신 나간 사람마냥 우두커니 서서 저수지에 깊이 담긴 검푸른 물을 바라본다. 손 흔드는 나뭇잎과 여유로운 풀잎이 햇볕을 태운 바람을 맞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옹알거린다. 이야기를 품은 외로운 그림자는 가냘픈 한숨을 살포시 내쉰다.잡초로 뒤덮인 내밀한 우물처럼 깊은 저수지 안쪽엔 슬픈 전설이 스며있다. 옛날 옛적에 마을 할머니가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저수지에 몸을 던졌다. 그로부터 주인 없던 못은 ‘할마이 저수지’가 됐다. 갈 길 잃은 할마이 영혼은 한 많은 사연을 들고 저수지를 마냥 어슬렁거릴 터. 물에 뛰어들면 세상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리라 믿었건만 정작 남은 것은 벗을 수 없는 업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한들 무엇 하리.윗마을과 아랫마을은 물로 연결된 운명공동체다. 허나 그 파이프가 끊어지면 연이 끊어지는 허무한 관계다. 이해관계에 매달린 인간세상의 덧없음이 물과 같다. 물을 모아둔 곳이라고 다를 건 없다. 저수지를 거닐다가 ‘색즉시공, 인생무상’의 깨달음을 얻는다. 도리사로 발길을 재촉한다. 도리사엔 어머니 같은 아늑함이 있고, ‘커다란 빈 항아리 속처럼 깊고 고요해져 환하다.’ 아미타불.오철환(문인)

빈집 피다/이분헌

그녀가 사는 곳은 피반령 아래 첫 동네/오동골 또는 먹골 감꽃 환한 양지마을/목이 긴/골목을 돌면/허물처럼 텅 빈 마당//혼밥에 익숙해진 다 늙은 몸뚱이//찾는 손 뚝 끊겼는지 무성한 고요 사이/괜찮나/바람의 안부에/졸음 겨우 밀어낸다//한때는 가슴에 반듯한 명패 달고/많은 식구 가난도 웃으며 넘겼는데/유산이 되지 못한 채/치매를 앓고 있다「경남시조」(2019, 36호)이분헌 시인은 충북 보은 출생으로 2006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다.작품의 첫 줄에 나오는 피반령은 충청북도 보은군 회인면과 충청북도 청주시 사이에 있는 고개다. 조선시대 오리 이원익 대감이 경주목사로 부임할 때 경주호장이 청주에 영접 나와 대감을 4인교에 태우고 험준한 고갯길을 넘던 중 호장이 오리 대감의 작고 볼품없는 풍모에 장난기가 발동해서 오리 대감에게 이 고개는 너무 험해 가마를 타고 넘으면 가마꾼이 힘들어 고개 너머 회인에서 며칠씩 쉬어가야 한다, 라고 아뢰자 대감이 힘든 가마꾼의 노고를 덜기 위해 고갯길을 걸어서 갔다고 한다. 그러자 뒤따르던 호장이 휘청거리며 걷는 대감을 놀렸다. 이를 알아챈 대감이 호장을 보고 대감인 내가 걸어가는데 호장인 네 놈이 어찌 같이 걷는가, 라고 호통을 쳤다. 그때 호장이 무릎으로 고갯길을 피가 나도록 기어 넘었다는 데서 피반령, 이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이렇게 길게 옮긴 것은 아무래도 ‘피반령’을 글감으로 시인이 또 다른 한 편의 시조를 써봤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가 일찍이 삶의 터전을 경남으로 옮겼지만 나고 자란 고향에 대한 사랑과 향수는 여전히 시인의 삶을 견인하는 추동력이 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녀가 사는 곳은 피반령 아래 첫 동네 오동골 또는 먹골 감꽃 환한 양지마을이고 목이 긴 골목을 돌면 허물처럼 텅 빈 마당이 있는 집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혼밥에 익숙해진 다 늙은 몸뚱이가 찾는 손 뚝 끊겼는지 무성한 고요 사이 괜찮나, 라고 하는 바람의 안부에 졸음을 겨우 밀어내고 있는 정황이 펼쳐지고 있다. 참으로 안쓰러운 정경이다. 한때는 가슴에 반듯한 명패를 달고 많은 식구와 더불어 가난도 웃으며 넘겼는데 그것이 유산이 되지 못한 채 치매를 앓고 있는 것이다. 정말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그는 또 ‘신중년 날다’에서 한 남자의 근황을 클로즈업하고 있다. 장바구니 한가득 번개시장 담아와 된장처럼 구수한 애창곡을 흥얼대며 앞치마 배에 두르고 꽃밥 짓는 그 남자다. 이쯤이면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만하다. 이러한 모습이 낯설지가 않다.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인지라 신나고, 보는 이도 흥겹다. 신중년이 새로이 날만하다. 그 남자는 또 출근하는 막내 녀석 셔츠 다려 보내고 능소화 붉은 마당에 줌바댄스 날리면서 투박한 손놀림으로 빨래를 넌다.시조에 나오는 줌바댄스를 찾아보았다. 줌바는 16가지에 달하는 핵심 동작 전체 또는 일부 동작을 사용하고, 줌바의 기본 동작은 라틴 댄스 장르인 살사, 레게톤, 메렝게, 쿰비아 리듬에 따른 4가지 핵심 동작이 있다고 한다. 그 남자는 이러한 동작을 다 익혔는가 보다. 일상 속의 춤을 통해 삶이 또 다른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이정환(시조 시인)

생명/ 류경희

~ 동병상련이라는 의사 ~…마트에서 상추를 보는 순간 입에서 침이 돌았다. 향긋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오랫동안 정신 줄 놓았던 은수에게 생기를 불러일으켰다. 문득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여름 옷 차림인데 우중충한 겨울옷을 입은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다./ 은수는 한적한 산책로를 걸어갔다. 새들이 나무 사이로 날아다녔다. 박제 독수리가 떠올랐다. 죽기 몇 달 전, 아들은 선물 받은 박제 독수리를 보고 무척 좋아했었다. 은수는 박제 독수리가 무섭기도 했지만 왠지 불길했다. 아들은 독수리가 새 중의 왕이고 길조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아들은 늘 웃음을 주는 착한 아이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야간자습을 마치고 돌아오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은수의 생일이었다. 주말에 오던 남편과 모처럼 데이트를 즐기던 중에 연락을 받았다. 사고를 낸 사람이 잘못을 빌었지만 아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은수는 실신하여 병원에 실려 갔다. 몸과 마음이 나날이 시들어갔다. 남편은 치유가 될 때까지 찾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겨울옷을 입고 나온 탓인지 얼굴과 몸에 땀이 흘러내렸다. 집으로 들어가던 중 계단에서 청소하던 늙은 여자를 만났다. 신쭈를 닦느라고 연신 땀을 훔쳤다. 측은한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시장바구니에 담긴 상추를 보곤 시장기가 도는지 입을 다셨다. 은수는 얼떨결에 함께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엔 인사치레로 알고 사양하였으나 진심을 확인 후 걸레를 주섬주섬 내려놓고 겸연쩍은 듯 손을 비볐다./ 낯선 여자와 함께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로소 집안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상추에 고추와 오이를 곁들여 상을 차렸다. 쌈장에서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낯선 두 여자는 상추쌈으로 배를 채우고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마치 오래 사귄 친구 같았다./ 여자는 아들 이야기를 했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반듯한 전자회사에 다녔다. 금 쪽 같이 키운 유복자 외아들이 소아마비 처녀와 결혼하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 처녀는 도서관 사서라 했다. 아들 하나 바라보고 온갖 고생 다해가며 뒷바라지하였는데 그런 아들을 몸도 성치 않은 처녀에게 장가보낼 수 없다고 했다. 여자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서렸다. 은수는 지난 해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었다고 말했다. 여자는 깜짝 놀랐다. 여자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여자의 눈물이 은수의 슬픔을 싣고 가는 듯했다. 여자는 옅은 미소를 띠며 고맙다고 했다./ 현관문 도어 록에 토마토 주스가 매달려 있었다. 그 여자의 메모쪽지를 보았다. 정말 고맙다는.…이 험악한 세상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것은 어쩌면 망각 덕분일 수 있다. 순간순간의 격한 감정을 망각이 순화시킨다. 끔찍한 기억을 누그러트리고 미칠 듯이 좋은 감정을 가라앉힌다. 평상심으로 리셋하고 몸을 낮추게 한다. 세월이 망각을 데려와 백지에 새 그림을 그리게 만든다. 인간이 극복하지 못할 슬픔은 없다. 견고한 것을 단단한 것으로 가공하듯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슬픔이 슬픔을 보듬고 삭인다. 슬픔은 슬픔을 치유한다. 슬픔으로 소통하고 동병상련으로 위로받는다. 소아마비 며느리 때문에 슬픈 여자는 아들을 먼저 보낸 엄마로 인해 슬픔을 날리고, 아들 잃은 엄마는 소아마비 며느리로 낙담한 여자에게서 슬픔을 녹인다. 사는 게 다 그런 것 같다.오철환(문인)

파꽃/윤애라

푸르고 단단하게 외발로 곧게 서서/하늘로 저 하늘로 밀어 올린 싸한 향기/마침내 희고 둥글게/꽃을 드는 발레리노//여린 싹이 발끝 뼈로 꼿꼿이 설 때까지/쓰러지던 향기를 세우고 가는 바람/수직을 꿈꾸던 그 몸/홀로 펼치는 무대//뼈 속까지 비워낸 몸 밤새 별빛이 쌓이고/구겨진 밤을 펴서 들어 올린 지그프리트/허공에 감춰진 손이/여문 씨를 털고 있다「정음시조」 (2020, 2호)윤애라 시인은 부산 출생으로 2020년 등단했다.‘파꽃’은 정겨운 이름이다. 파가 우리 몸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파김치, 파재래기, 파를 송송 썰어 넣은 곰국이나 소고기국은 우리 음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화자는 파꽃의 외양을 살피면서 푸르고 단단하게 외발로 곧게 서서 하늘로 저 하늘로 밀어 올린 싸한 향기라고 읊조리다가 마침내 희고 둥글게 꽃을 드는 발레리노, 라고 의미부여를 하고 있다. 새로운 접근이다. 아마 불현듯 그런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발레리나가 아니라 발레리노를 떠올린 것은 파꽃에서 남성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리라. 여린 싹이 발끝 뼈로 꼿꼿이 설 때까지 쓰러지던 향기를 세우고 가는 바람, 이라는 둘째 수의 섬세한 감각이 돋보이고, 수직을 꿈꾸던 그 몸 홀로 펼치는 무대, 라는 종장도 눈길을 끈다. 그리해 뼈 속까지 비워낸 몸 밤새 별빛이 쌓이고 구겨진 밤을 펴서 들어 올린 지그프리트라고 노래하면서 차이콥스키 발레곡 ‘백조의 호수’의 남자 주인공을 등장시키고 있다. 구겨진 밤을 펴서 들어 올린, 이라는 구절은 단순히 아름답다고만 말할 수 없는 삶의 곡진한 아픔이 밴 대목이다. 허공에 감춰진 손이 여문 씨를 털고 있다, 라는 결구에서도 시인의 역량이 충분히 헤아려진다. 이렇듯 화자가 한 사물이나 미묘한 정경을 예의주시하다가 이미지로 잡아채어 미학적 언어로 직조한 결과물을 통해 독자는 공감과 더불어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시의 효용성이 이런 데 있지 않겠는가?또 다른 작품 ‘망종 무렵’을 본다. 망종은 24절기 중 아홉 번째 날로 소만과 하지 사이에 있는 절기다. 24절기는 태양의 궤도인 황도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정해지므로 양력 날짜에 연동된다. 망종은 태양의 황경이 75°인 날로 대개 6월6일이다. 절기 이름은 종자를 뿌린다는 의미이나 한반도에서는 보리를 베고 모내기가 한창인 계절이다. 망종 무렵에 시의 화자는 햇살에 몸 말리던 다 늙은 담벼락이 힘겹게 기대어 오는 꽃 하나를 받고 있다. 만지면 부서질 듯이 바삭거리는 아흔둘이다. 이 대목에서 문득 가슴이 쿵하면서 뭉클해진다. 한바탕 꿈만 같은 꽃무늬 파종의 때인 그때를 되뇌시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른 입술 적신다. 그 모습은 기억을 뒤적이면서 씨앗을 찾는 바람이다. 화자는 분주했던 날도 이제 물 가둔 논이라면서 남은 날 꼭꼭 심어 햇살로 북돋우면 초록이 글썽이면서 목쉰 노래 부른다고 끝맺고 있다. ‘망종 무렵’은 햇살과 초록이 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있는 노래다. 가는 세월 앞에서 장사가 없으니 순리를 좇아 살아갈 일이다.두 작품에서 보듯 윤애라 시인은 개성이 뚜렷하다. 형상화 과정에서 예사롭지 않은 이미지를 체현해 보인다. 실로 조탁능력이 비범하다. 또한 오랜 각고의 노력이 뒷받침됐겠지만 언어를 부리는 능력과 감각이 남다른 데가 있다. 앞으로 시조문단을 윤택케 하는데 적지 않은 몫을 감당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천착에 천착을 거듭해 대성하시기를!이정환(시조 시인)

나무가 바위를 들어 올리는 방법/ 방종헌

나무가 바위를 들어 올리는 방법을 대둔사 연리근에서 보았다// 바위든 나무든 서로가 쉽사리 피와 살을 내주는 관계는 아니다// 물길을 여는 잔뿌리들이 바위를 감싸 안고/ 천천히 서로를 품어가는 시간, 몇 생애의 눈길이 지나갔으리라// 혼자서는 감내할 수 없는 외로움이/ 서로를 더듬어 열기를 옮기는 일에 몰입하자// 바위는 제 몸에 품었던 오래된 화산의 열기를 내주었을 것이다// 사랑으로 뿌리를 서로 이은 것은/ 바위와 더불어 도반의 길 함께 하려는 행선(行禪)이었을 것이다「대구문학」 (대구문인협회, 2021. 4)전남 해남 두륜산 대둔사에 가면 거대한 연리근을 볼 수 있다. 두 나무가 하나로 연결된 나무를 연리목이라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가지가 붙으면 연리지, 뿌리가 붙으면 연리근이다. 둘이 하나로 합체된 모습은 남녀의 교접모양을 연상한다. 그래서 연리목은 사랑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뿌리의 근성을 감안하면 연리근이 더 흔하겠지만 땅 밑에 숨어있는 까닭에 사람 눈으로 드러나 화제가 되는 것은 대개 연리지다. 사랑은 생명의 단초가 되는 정신작용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연리지가 나타나면 길한 조짐으로 반긴다.수성못에 가면 연리지를 볼 수 있다. 나무도 수성못에 충만한 사랑의 기운을 받은 모양이다. 일본인 개척농민 ‘미츠사키 린타로’와 그의 벗 ‘서수인’이 의기투합해 수성못을 조성한 원동력도 인간과 땅에 대한 사랑이다. 수성못은 사랑의 발원지인 셈이다. 강력한 사랑의 기운이 연인의 발길을 끌고 나무마저 사랑을 나누게 만든 터다. 수성못 수변무대 난간에 연인들의 자물쇠가 빼곡히 매달려 있는 것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땅 위로 솟아오른 거대한 연리근을 보면서 시인은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해 깊은 땅속에 시혼을 불어넣는다. 오랜 세월 동안 일편단심 사랑한 결실로 서로 다른 개체가 하나가 돼 솟아 오른 뿌리 위에 듬직한 바위를 하나 그려 넣은 것이다. 나무와 나무는 피와 살을 나눌 만한 관계이지만 나무와 바위는 웬만해선 서로의 마음을 허락할 것 같지 않다. 희생과 인내, 관용을 연결고리로 나무와 나무, 나무와 바위를 소통하게 하고 피와 살을 나누게 한 바탕은 사랑이다.다른 개체 간 소통은 자그마한 곳에서 물꼬를 트고 오랜 세월에 걸쳐 공을 들여야 비로소 가능하다. 잔뿌리들이 바위를 보담아 느긋하게 세월을 보내고 외로움을 견디다 보면 차갑게 식어있던 바위도 마침내 마음의 문을 조금 열게 마련이다. 서로를 안고 정성껏 어루만진 결과는 놀랍다. 사랑은 몸을 달아오르게 하고 마음을 달뜨게 한다. ‘바위는 제 몸에 품었던 오래된 화산의 열기’까지 내주고 만다.하얀 잔뿌리도 나이를 먹으면 굵어지고 힘이 붙는다. 이웃 나무의 뿌리와 치열하게 경쟁해 살아남기도 하고 도태되기도 한다. 서로 마음이 맞아 한 몸이 되면 외로움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산술적 결합 이상의 힘이 발생한다. 사랑의 힘으로 뿌리를 잇고 시너지로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린다. 나무가 바위를 들어 올리는 방법은 의외로 간명하다. 믿음과 소망으로 이웃 나무와 힘을 합치고 인내와 사랑으로 바위와 소통한 결과다. ‘사랑으로 뿌리를 서로 이은 것은 바위와 더불어 도반의 길 함께 하려는 행선’이다.오철환(문인)

아무튼/ 김소운

종합병원 접수창구 앞에/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또 한 번 출입문이 열리고/ 지팡이를 짚은 노파가 들어와/ 두리번거린다. 그때/ 줄에 있던 어떤 이가 다가가/ 뭐라 말을 주고받더니/ 노파를 부축하며 저만치 걸어간다./ 느닷없이 누군가가/ ‘요즘에도 저런 아가씨가 다 있네!’/ 그러자 몸이 불편하던 표정들이/ 잠시 환해졌다.// 소소한 선행이 무슨 대수라고…/ 아무튼 얼굴을 지나는 바람이/ 따뜻하네,/ 다시 봄이다.「대구문학」 (대구문인협회, 2021. 4)세상은 험하다. 그래선지 모르겠지만 험한 세상을 사는 인생을 불가에선 고해라고 한다. 고해를 쉽게 표현하면 ‘스트레스 천지’라는 말이다. 산다는 것이 온통 스트레스이고 죽지 않는 다음에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는 말해서 입만 고단한 불변의 진리다. 인간이 사악해서 험악한 세상이 된 건지, 세상이 험해서 인간이 고통을 받는 건지, 그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와 비슷하다.인간의 본성이 사악하다는 성악설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은 고통 속에 살아갈 운명이고 그런 인생이 펼쳐지는 무대인 세상은 험악하기 마련이다. 그 반면 인간의 본성이 선량하다는 성선설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환경인 세상이 너무 척박하고 험악해서 인간의 삶도 자연히 고통 속에서 평생 허우적거린다고 볼 수 있다. 지구의 환경을 돌아보면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사막이나 황무지도 있지만 살기 좋은 땅도 많다. 무작정 환경 탓만 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성악설의 눈으로 보는 세계관에 귀를 기울이게 한다.흔히 유아를 차용한 가설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유추하기도 한다. 유아가 다른 유아의 과자를 빼앗아 자기 입으로 가져가는 자연스러운 모습에서 인간의 타고난 이기적 성정을 추론하고자 시도한다. 유아가 깊은 우물이나 절벽으로 기어가는 경우, 인간이라면 누구나 뛰어가서 아이를 안고 나올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성선설의 유력한 증거인 것처럼 내세우기도 한다. 어느 경우나 제법 설득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런 한두 가지 케이스만 갖고 인간 본성을 결론짓긴 무리다. 중성주의나 백지설과 유사한 성무선악설도 있긴 하지만 눈을 끄는 흡인력은 없다.종합병원 접수창구에서 일어난 일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잔잔한 감동을 전해준다. 성선설 사례집에 추가할 만하다. 줄 서서 기다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까닭에 긴 줄 가운데 서 있다가 몸이 불편한 노파를 돕기 위해 조그만 기득권, 기다린 수고를 선뜻 버리고 나가기란 쉽지 않다. 진정성을 따지기 전에 먼저 눈에 띄는 남다른 의외성이다. 과시용 쇼가 아니기에 가슴에 와 닿는다. 짜증나는 삶 속에서 한줄기 신선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찡그린 표정이 잠시나마 살짝 펴진다.드러내놓고 표창할 만한 선행엔 미처 못 미치지만 그렇다고 혼자 알고 넘어가기엔 아가씨의 선한 마음이 너무 예쁘다. 거창한 선행보다 오히려 더 포근하고 더 짠하다. 가여운 마음에 돌연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든지, 지팡이를 짚은 노파를 보면서 편찮은 엄마를 연상한 것이었든지,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진정성에서 우러나오는 따스한 정이 향긋할 뿐이다. 행복은 소소한 일상 속에 숨어있다. 아무튼, 봄이 봄 같지 않은 가운데 불어온 따뜻한 봄바람이다.오철환(문인)

숲/조성국

비밀이 없는 숲엔 독한 비밀이 있지//슬픔이 없는 숲엔 독한 슬픔이 있고//우리가 화창한 날에 죽은 나무도 있어「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 (2021, 시인동네)조성국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최근에 첫 시조집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를 상재했다.우리는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다. 특히 글 쓰는 이에게는 이 사실이 중요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글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다. 누구나 아는 낯익은 발상인가 하는 문제다. 새로운 발화, 새로운 착상이 없다면 독자는 금세 싫증을 느끼게 된다. 또 유사한 읊조림이구나 하고 눈길을 거둬 간다. 조성국 시인은 첫 시조집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에서 독창적인 형상화 과정을 거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이 시인이 이러한 생각과 사상과 시풍을 지닌 줄을 미처 몰랐구나, 하는 느낌을 전편을 통해서 강하게 받는다. 시조에 관한 글을 쓰는 자리에서라면 누누이 개진하는 지론인 새로운 목소리의 발현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그가 얼마나 한 편의 작품을 위해 몸을 던지고 있는가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의 남다른 개성은 연조와 상관없이 큰 기대를 걸어도 좋을 터다.‘숲’을 보자. 남들이 듣든 말든 능청스럽게 독백 중인 것을 눈여겨볼 일이다. 비밀이 없는 숲엔 독한 비밀이 있단다. 슬픔이 없는 숲엔 독한 슬픔이 있단다. 그러다가 종장은 예상 밖의 반전을 보인다. 우리가 화창한 날에 죽은 나무도 있어, 라고 태연자약하게 끝맺는다. 사실 숲은 생태학적 상상력의 보고가 아닌가? 생명이 약동하는 초록의 세계다. 그 세계에 독한 비밀이 있고, 독한 슬픔이 있으며, 우리로 지칭된 무리가 화창한 날에 죽은 나무도 있다는 진술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점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운신할 수 있는 상상의 공간이 그만큼 확보돼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일찍이 김정휴 시인이 보여준 바 있는 단시조 ‘장경각’의 이미지가 불현듯 떠오른다. 조성국 시인의 정신적 수맥은 이렇듯 도저한 데가 있다. 다른 단시조 몇 편을 더 보겠다. 싹이 노랗다거나 무청이 짧다거나 색감 있는 샐러드에 끼어들지 못하거나, 독하게 속 썩은 죄로 조각난 무는 있다, 라면서 ‘깍두기’를 노래하고 있다. 진실로 실감실정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서 한 사람의 초상이 그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압축됐던 천 년이 일시에 개봉 되자 햇빛이 기다리다 눈부시게 파고들었다, 라고 하다가 어딨지, 하면서 금동신 벗어놓고 달아난 신라 여자를 ‘낮달’을 통해 읽어낸 점도 예사롭지가 않다. 그의 상상력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작동하고 있다. ‘달팽이’라는 단시조는 모래알만 한 입과 위장 컨테이너에 싣고 세상 저 바깥으로 포복해나가는 동안 그이가 먹은 풀잎과 이슬 총량은 2.8g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 역시 생태학적·생명시학적 태도와 발상에서 기인된 구체적인 생생한 비유가 낳은 시편이다. 많은 시인들이 달팽이를 시화했지만, 여기 이 ‘달팽이’는 조성국표 달팽이다.보기 드물게 그는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은 일체를 이뤄야 한다는 ‘녹색평론’ 발행인이었던 김종철의 지론을 시조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번 시조집 제목 ‘적절한 웃음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참신하다. 사실 시조집 제목만 봐도 그 작품 세계를 웬만큼은 진단할 수 있다.앞으로 시조문단을 융성케 하는데 일익이 되리라 믿는다.이정환(시조 시인)

오동나무와 오동나무/ 서상조

~ 배려 속에 싹튼 사랑 ~… 스물다섯 살 영순은 시집살이 삼년 차 새댁이다. 저녁 설거지를 하고 나와 호숫가 바위에 걸터앉아 달을 보며 시집살이 설움을 힐링하곤 한다. 바위 옆에 서있는 어린 오동나무의 외로운 모습이 자신의 운명을 빼닮은 아바타와 같다. 시집살이를 견뎌낼 수 있도록 응원하는 원군이다. 영순은 신랑 얼굴도 보지 못한 채 팔려왔다. 신랑은 뇌기능이 점차 마비돼가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셈이다. 초저녁 호숫가에 있는 시간은 자신의 욕망을 죽이는 시간이다./ 고향 사람들은 영순이 경상도 부잣집으로 시집가서 행복하게 사는 줄 알았다. 친정 식구들은 영순에게 피해를 줄까봐 발길을 끊었다. 영순은 어릴 때부터 정을 두고 있던 동네오빠가 있었다. 영순의 사정을 알고 이종사촌 오빠라고 속이고 한나절을 머물다 갔다. 영순은 주체하기 힘든 욕망을 꾹 억눌렀다. 영순은 힘들 때마다 오동나무에 이마를 대고 기댈 곳 없는 마음을 의탁했다. 오동나무가 애인이었고 종교였다./ 오동나무에 등을 기대고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수는 달을 품고 일렁거렸다. 어디선가 ‘삐이’하는 휘파람새 소리가 들려왔다. 고향마을에서 듣던 새소리였다. 고향 생각, 동네오빠 생각이 새록새록 났다. 고개를 흔들며 머리를 비웠다. 속이 빈 오동나무를 보며 눈물을 삼켰다./ 영순이 양지바른 곳에 앉아 국화꽃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읍내에서 행정서사가 찾아왔다. 인근에서 땅을 중개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그 남자는 남편을 만나 뭔가 의논을 하다가 돌아갔다. 그날 저녁 남편은 영순에게 친정에 다녀오라고 제안했다. 기쁘기도 했지만 의아하기도 했다. 장인어른께 작은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남편의 재촉에 못 이겨 영순은 친정 나들이 길에 올랐다. 남편이 챙겨준 종이상자를 갖고 고향마을로 들어섰다. 고향산천은 변함없이 영순을 반겨주었다. 어린 시절 앉아 놀던 바위에 앉아 잠시 옛 추억에 잠겼다. 궁금증이 일어 종이상자를 꺼내보았다. 남편이 쓴 쪽지를 읽어 내려갔다. 남편은 영순을 지켜보면서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고향의 휘파람새 소리도 남편이 영순을 위해 불어준 호각소리였다. 종이상자 안에 논 네 마지기를 판 돈이 들어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르고 손이 가늘게 떨렸다. 자신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남편은 속 넓은 오동나무가 되어 있었다. 작은 오동나무 밖에 되지 못 한 자신의 모습이 초라했다. 얼마 남지 않은 삶이지만 결코 짧지 않은 삶으로 만들어 주리라고 다짐했다.…이런 이야기를 꼰대의 넋두리 정도로 폄훼할 수 있다. 불과 얼마 전 이야기다. 그 땐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딸들이 비일비재했다. 팔려가다시피 시집갔던 딸, 공장에 다니거나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면서 가족을 뒷바라지 했던 딸, 술집 작부로 있으면서 동생들을 대학까지 보냈던 딸은 이웃집 누나였다. 아들에 치여 진학을 포기한 채 공장에 다니면서 주경야독했던 딸들은 우리 모두의 누나였다.뜨거운 정이 주린 배를 보듬어줬고, 배려와 양보가 서로의 마음을 이어줬다. 비록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처지였지만 가족이나 운명을 탓하거나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오동나무와 교감하고 달과 벗하며 외로움을 달랬다. 고통과 욕망을 이겨내고자 자신과 싸우는 눈물겨운 모습이 감동적이다. 오동나무처럼 비우고 살아가는 삶을 추구하는 정신이 아름답다.오철환(문인)

귀/권혁모

그냥 두어도 될 걸 또 건드리고 말았다/속삭임도 느껴야 할 한 겹의 상피세포를/미워도/미워하지 않으며/사랑으로 닦는다//달팽이관 어디쯤에 그리움이 사나 보다/한쪽이 불편하면 다른 쪽도 따라 불편한/서로가 그리며 살아/사뭇 아픈 관계여「첫눈」 (2021, 좋은땅)권혁모 시인은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조집 ‘오늘은 비요일’, ‘가을 아침과 나팔꽃’, ‘첫눈’이 있다. 최근에 펴낸 ‘첫눈’에서 시인의 말을 읽는다. 시도 그림이 아니더냐? 마음의 소리로 그린 구상 혹은 비구상의 흔적들, 이 모습 이대로가 그동안의 화첩이었다고 생각하니 화가의 꿈도 반쪽을 이룬 것 같다. 이만치 살아오면서 빚진 이야기를 상형문자로 남겨둔다. 그러면서 시는 해석이 아니라 서정이다, 또 하나의 생명을 얻어 그대 창가로 가는 길이다, 시로 하여 가슴이 뛴다, 라고 적고 있다. 시에 대한 곡진한 사랑 고백이다. 진솔한 시인의 육성을 눈앞에서 듣는 듯하다. 시력이 사십년에 육박하고 있는 시인이 아직도 시로 말미암아 가슴이 뛴다는 것은 하늘의 은총이다.시조집 맨 첫머리에 나오는 ‘귀’를 읽는다. 귀에 관한 사유다. 귀는 얼굴의 균형을 잡아주는 청각기관이다. 두 귀는 일정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그 거리가 딱 마침맞다. 그냥 둬도 될 걸 또 건드리고 말았다, 라는 첫줄에서 안 해도 될 일을 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뒤이어 속삭임도 느껴야 할 한 겹의 상피세포를 미워도 미워하지 않으며 사랑으로 닦는 모습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 애틋한 정을 엿본다. 그리고 화자는 달팽이관 어디쯤에 그리움이 사나 보다, 라고 유추하면서 한쪽이 불편하면 다른 쪽도 따라 불편한, 서로가 그리며 살아 사뭇 아픈 관계를 상기한다. 여기에서 문득 부부관계를 떠올리게 된다. 사랑으로 뭉쳐진 사이지만 오래 살다보면 애증이 깊어서 사뭇 아픈 관계일 때가 많지 않은가? 시어로 적절히 쓰인 상피세포와 달팽이관이 눈길을 끈다. 세포의 층을 구성하는 막 조직으로 우리 몸과 조직의 안과 밖을 덮고 있는 것이 상피다. 이를 구성하는 세포를 상피세포라고 하는데 이 시어가 묘한 울림을 안긴다. 또한 달팽이관은 귀의 가장 안쪽인 내이에 위치하고 듣기를 담당하는 청각기관으로 내부에는 림프액이 채워져 있고 청각세포가 분포해 있다. 그런 은밀한 지점에 있는 달팽이관을 두고 화자는 그 어디쯤에 그리움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조심스레 말하고 있다. 어쩌면 그리움 그 이상의 정조 즉 인간의 정신활동에 따라서 일어나는 고차원적이고 복잡한 감정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그는 또 ‘봄날’에서 꽃은 왜 또 피나 봄바람 옷깃을 잡네, 라면서 공연히 혼자 있어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산당화 눈부시다 못해 눈물은 자꾸 솟는 것을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을 곧이곧대로 토로한다. 목석같은 사내라도 꽃피는 봄날에 마음이 들뜨지 않겠는가? 하물며 시인임에랴. 봄바람이 옷깃을 잡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는가. 꽃이 들썩이며 온갖 눈짓을 다 보내고 있는데 어찌 맹숭맹숭 있겠는가? 어제는 물관을 타고 수액이 넘쳤다지 않는가? 그런데 오늘은 링거 줄 따라 지문만 남긴 봄이다. 진실로 한 송이 꽃으로밖에 남겨 둘 수밖에 없는 일이다.‘귀’를 다시 읽으며 관계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상생이 더욱 요청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타정신 없이 밝은 사회를 이루기는 어렵다. 피고 지는 꽃을 바라보면서 군락의 아름다움 속에서도 서로를 위한 삶의 길을 읽어내었으면 좋겠다.이정환(시조 시인)

예언/ 박성규

계단 없는 집을 지었다// 계단이 있어도/ 그냥 더벅더벅 걸어서 들어가면 되지만/ 마당과 방 높이를 같이 맞추어/ 기어 들어가기 쉽게 했다// 높은 곳이 좋은 줄 알고/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담장이 전법도 써봤고/ 고양이 타법도 써봤고/ 사다리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한 지금/ 더 이상은 계단이 필요 없다// 마당과 방이 같은 높이인 까닭/ 살아보면 안다「내일 아침 해가 뜨거나 말거나」 (문학의전당, 2021)우리의 몸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하지 않고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며, 출세해 후세에 그 이름을 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끝이다. 이는 효경에 나오는 공자님 말씀이다. 성인 반열에 오른 공자님 말씀을 일개 필부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비록 가소로운 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토를 달아보고자 한다.유교에서 효를 근본적인 도리로 규정하고 신체를 훼상해 부모에게 근심·걱정을 끼치지 않는 것을 효의 출발선으로 본다.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세상에 나아가 크게 출세함으로써 이름을 혁혁하게 하고 부모를 빛내는 것을 효의 완성으로 본다. 이 말의 의미를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출세를 효의 필요충분조건처럼 내세우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인생의 참다운 성공은 행복에 있고 행복은 정신적 만족에서 발아한다. 출세지상주의에 방점을 찍은 공자님 말씀은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한 듯하다.조선은 유교를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확립한 시대다. 사대부는 유교의 기본 가치인 효를 완성하기 위해 출세를 최상위 목표로 설정하고 그에 도달하고자 평생 동안 정진했다. 관직에 나아가 고위직으로 승진하는 것을 출세의 척도로 삼았다.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과거시험을 출세의 등용문으로 생각했다. 나라의 인재들이 과거에 필요한 유학만 공부하고 과학·기술이나 의술 등 실용학문을 등한히 했다. 지도층은 탁상공론만 일삼고 상공업이나 서비스산업을 외면하고 천시했다.유학의 영향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아있다. 온 국민이 출세를 위해 일제히 매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달라 진 게 있다면 출세의 범주에 황금만능주의가 추가된 정도다.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행한다. 고지에 오르기 위해 학교와 학원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정작 소중한 인생을 허송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출세하기 위해선 남을 짓밟고 올라서기 일쑤다.천신만고 끝에 고지에 올라가 봐도 효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출세라는 외양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행복이란 속살도 얻을 수 없다.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 출세이고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일인 줄 알았다. 거기엔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정상엔 탐욕과 자만심만 무성하다.별의별 수단·방법을 써봤지만 높은 곳에 오르기엔 힘이 부친다. 해가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즈음 비로소 깨닫는다. 오를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해진다.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을 수 없고 더 이상 필요하지도 않다. 계단이 있는 집도 좋지만 마당과 방 높이가 같은 집이 오히려 더 좋다. 살아보면 안다. 마음만 바로 먹으면 낮은 집이 바로 높은 집이다. 시인의 예언에 공감한다.오철환(문인)

블랙리스트/ 강해림

장미가 꽃 피우기를 거부하고 묵언 시위를 했더니// 동네 약국의 약들이 서로 색깔과 출신 성분이 다르다고 같은 진열장에 있기를 거부했는데// 산에 가서 물고기를 찾고 강에 가서 나무를 찾았더니 불순분자라나 뭐라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시치밀 뚝 떼었더니// 혹자는 길들여지지 않은 눈을 두려워했으므로, 퇴폐라는 딱지를 붙여버렸는데// 먹구름들끼리 심심해서 삼삼오오 몰려다녔는데 수상한 거래의 정황이 포착되었다나 어쨌다나// 검열에 걸리고도 의기투합한 문장들이 조롱과 풍자로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밤의 기밀문서를 빼돌린 손목들은 대부분 화사했는데 자고 일어나니 주홍 글씨가 새겨지고// 머리에 빨강 물을 들이고 집회에 나갔더니, 아 글쎄「슬픈 연대」 (천년의시작, 2021)블랙리스트는 어떤 이유로 인해 경계할 필요성이 있는 요주의 인물의 명단이다. 그 연혁을 보면 정치권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초창기엔 제거대상으로 분류되는 정적 명부로 살생부라는 의미였다. 잉글랜드의 국왕 찰스 2세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작성한 살생부가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혁명이나 정권교체기에 살생부가 나돌고 참혹한 피바람이 불었다. 우리나라라고 다를 바 없다. 조선 건국 전후와 계유정난 당시의 살생부는 소설이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현대 민주주의 사회로 들어와서 블랙리스트는 많이 순화된 모습이긴 하지만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창궐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가면 갖가지 불이익을 받는다. 보통 자리, 감투, 승진 등 인사권을 무기로 활용해 응징하거나 불이익을 준다. 예산, 포상 따위를 무단히 삭감하거나 그 대상에서 아예 제외시킴으로써 순응하지 않고 치받은데 대한 보복을 한다. 블랙리스트는 이제 문화예술에까지 나타나 창작 활동에 찬물을 끼얹는다.블랙리스트의 상대 개념은 화이트리스트다. 그런 차원의 화이트리스트는 주체세력의 핵심으로 분류되는 매우 호의적인 인사의 명부다. 화이트리스트는 당해 시점 리딩그룹의 긍정적 인력풀이나 논공행상의 대상으로 기능한다. 블랙리스트가 배제할 부정적 명부로 전체적으로 볼 때 긍정적인 부문이 훨씬 큰 반면 화이트리스트는 챙겨줄 긍정적 명부로 전체적으로 볼 때 부정적 포지션이 훨씬 크다. 두 리스트가 다 활용되는 경우는 가히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예술행위에 딱지를 붙이고 출신지역이나 성분에 따라 편을 갈라 흑백 명부를 작성한다. 예외를 이야기하고 다수와 다른 목소리를 낸다고 까맣게 칠한다. 하늘을 보지 않으려는 의지도 인정하지 않고 명부에 올린다. 기성의 눈으로 보지 않고 참신한 시각으로 보는 사람의 이름에 퇴폐라는 딱지를 붙인다. 꿀꿀한 사람끼리 모여 있어도 수상한 눈길을 보내며 이름을 적는다.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조롱과 풍자도 레테르를 붙인다. 공공을 위해 내부정보를 공개한 하얀 손에 배신의 프레임을 씌우고 먹물을 친다. 빨간 염색을 하고 다닌다는 이유로 우리 편이 아니라 적이라는 낙인을 찍는다.시인이라고 항상 은유와 상징으로 땅굴을 파고 다니거나 하늘 위를 날아다닐 수 만은 없다. 발을 딛고 선 땅이 턱도 없는 일로 방해받는 상황에선 시의 힘을 보여줘야 존재의 본질을 지켜낼 수 있다. 시에 이념이 있다손 시인의 이름을 적어선 안 된다.오철환(문인)

책갈피의 기분/이희정

읽는다는 것은, 견딘다는 것이지/속지를 뒤채는 뾰족한 감정들에/한없이 납작해진 몸/옴짝달싹 못 하고//건너온 스토리, 가야 할 다음 사이//접질린 전개에 자욱하게 피는 갈등/복선에 물린 활자들이/엔딩을 캐고 있는//조각조각 이어진 플롯의 패턴 아래/읽어야 할 서사를 베고 누운 풀처럼//꼭 물린 휴지의 시간,/반전이 기다린다「오늘의시조」(2021, 제15호)이희정 시인은 경남 김해 출생으로 2019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제목 ‘책갈피의 기분’은 김먼지 작가의 책 이름이다. 거기서 연상한 것을 시화하고 있다. 읽는다는 것은, 견딘다는 것이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속지를 뒤채는 뾰족한 감정들에 한없이 납작해진 몸 옴짝달싹 못 하고 있는 것은 책갈피가 처한 현실이다. 꽤나 예민하고도 세밀한 정서 표출이다. 그 다음으로 건너온 스토리, 가야 할 다음 사이 접질린 전개에 자욱하게 피는 갈등이라는 대목을 통해 자아가 투영된 책갈피의 정황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복선에 물린 활자들이 엔딩을 캐고 있는 중이다. 이어서 조각조각 이어진 플롯의 패턴 아래 읽어야 할 서사를 베고 누운 풀처럼 꼭 물린 휴지의 시간, 반전이 기다린다, 라고 진술하면서 끝맺고 있다. 책갈피를 두고 서사를 베고 누운 풀처럼, 이라고 직유하고 있는 점도 참신하다. 세련된 수사법과 모던한 감각에서 비롯된 속지, 감정, 몸, 스토리, 전개, 갈등, 복선, 활자, 엔딩, 플롯, 패턴, 서사, 휴지, 반전 등과 같은 이채로운 시어들이 연첩되면서 의미의 진폭을 일으킨다. 분명히 새로운 목소리다. 이제까지 대한 적이 없었던 미학적 이미지 직조다. 그만의 길을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차용하기는 했지만 책갈피의 기분을 이렇듯 섬세하게 헤아리고 있다는 것은 썩 의미 있는 일이다.그는 또 ‘눈높이 우화’에서도 개성적인 시의 눈을 열고 있다. 첫줄, 새들의 공중에는 높이 따위는 없다, 라는 표현이 눈길 끈다. 별안간 무슨 깨우침 같은 번뜩임이 있다. 그러면서 화자는 단호히 말한다. 높이란 지상에서의 층계일 뿐이다, 라고. 읽자마자 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래서 새는 더 높이 날기 위해서 날지는 않는다, 라고 화자는 단언한다. 그러다가 갈매기 조나단을 등장시킨다. 조나단에게 씌워진 눈은 인간의 것,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학습은 무리 지어 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화란, 안경을 깨고 새 눈으로 보는 것이라고 화자는 강하게 주장한다. ‘눈높이 우화’라는 제목도 새로운데 두 수 전편에 흐르는 간명한 노래도 격이 있고, 나름의 철학이 있다. 인격화한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가 우화일진대 우화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화자의 생각은 인생의 모든 문제를 다각도로 살펴야 한다는 뜻까지 함유하고 있는 듯해 눈길을 끈다.이미 벚꽃이 진 지 오래지만 시인의 또 한 편의 노작 ‘벚꽃 만남’을 찾아 읽어 본다. 방전을 목전에 둔 만개한 시간처럼 꽃이어도 좋고 벗이어도 좋을 만남 배터리 충전도 없이 한시적인 번개팅, 이라고 노래하다가 벗보다 벚꽃이 먼저 와 보채는 길 온천천 양 갈래 벗과 벚들 팔짱 끼고 뭉쳐둔 분첩 속 분말들 쏟아진 환한 수다, 라고 끝맺고 있는데 넘실넘실 경쾌한 리듬과 깜찍한 재치가 두루 어우러져 시조 읽는 맛과 멋을 만끽하게 하니 즐거움이 크다.그의 등장이 우리 시조를 윤택케 하는데 일조를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이정환(시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