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내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올 수만 있다면//살얼음 흐른 내 뺨에 너 좋아하던 강물 소리, 들려주겠네「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5)일반 시집을 읽다가 곳곳에서 시조 가락이 흐르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조지훈의 ‘승무’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현대시문학사에서 이름을 널리 떨친 시인들로부터 요즘 왕성하게 활동하는 신진 시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그러한 흐름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굳이 그러한 점에 대해 애써 외면하거나 관심 밖인 경우가 많다. 작품은 지면에 발표되는 그 순간부터 작가의 손을 벗어나 불특정다수인 독자의 것이 된다. 자유시로 썼더라도 시조나 사설시조로 읽히면 읽히는 대로 읽는 것이 옳다. 이것은 온전히 음미하는 이의 몫이기 때문이다.‘서울의 겨울 12’는 소설가 한 강의 첫 시집 136쪽에 수록돼 있다. 의미전개와 더불어 유장한 사랑의 가락을 천천히 좇아가보라. 사설시조 고유의 질펀한 가락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사랑, 물빛, 가슴, 숨, 먹장 입술, 벅찬 숨결, 살얼음, 뺨, 강물 소리와 같은 순결한 이미지가 하나로 꿰어지면서 마음 속 깊이 잔잔한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그는 또 ‘회복기의 노래’에서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라고 노래하고 있다. 한 수의 단시조에 가깝다. 결구에서 빛, 앞에 흰, 을 놓으면 시조로서 손색이 없다. 흰, 이라고 하니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다. 한 강이 2016년에 펴낸 소설 ‘흰’이다. 철저하게 흰 이미지나 소재만을 선택해 미묘하게 이야기를 펼치는 독특한 소설이다. 강보, 배내옷, 소금, 눈, 얼음, 달, 쌀, 파도, 백목련, 흰 새, 하얗게 웃다, 백지, 흰 개, 백발, 수의, 눈보라, 젖, 초, 성에, 서리, 진눈깨비, 입김, 은하수, 각설탕, 모래, 넋, 연기, 구름, 백야 등이다. 한 가지 빛깔의 이미지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이채롭고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때로는 섬뜩하게 이끌어가고 있어서 어느 때는 감탄을, 어느 때는 이야기 속의 한 영혼이나 혹은 사물이 된 듯한 느낌을 연이어 받게 된다. 한편으로는 산문시를 읽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그래서 ‘회복기의 노래’를 읽다가 빛, 앞에 흰, 을 놓았으면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그의 시집과 소설을 동시에 읽는 과정에서 일어난 묘한 미학적 정황이다. 올바른 독해나 감상 여부를 떠나서 자연스럽게 그리 읽혔다는 데 작은 의미를 부여하면 좋을 듯하다.이정환(시조 시인)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