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 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민음사, 19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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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는 어떤 작품을 모방해 새롭게 재창조하는 것으로, 비판적 의도로 쓰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시는 김춘수의 ‘꽃’을 패러디하여 ‘사랑’을 풍자한 독자적 문학 행위인 동시에 전혀 새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춘수의 꽃이 관념적 존재라면 장정일의 라디오는 가시적이고 구체적이다.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 꽃의 의미가 살아나는 건 아니고, 단추를 꾹 눌러주어야 비로소 사랑이 작동된다.



더 이상 사랑은 온건한 정서적 행위가 아니라 건조하긴 해도 버턴을 누르고 전파가 오가야 그 꽃이 피어나는 구체적 행위다. 쉽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랑의 편의와 실용을 비판하는듯하지만 결국 이 전파는 나와 그 누군가를 이어주는 존재이면서 사랑의 감정 그 자체이기도 하다. 다만 그 실용이 지향할 만한 것인지 천박한 것인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김춘수의 꽃에서 보여주는 전통적 사랑이 진지하고 묵직하게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노래했다면, 이 시는 그와 반대로 가볍고 감각적인 어투로 사랑의 세태를 풍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이 시의 뒤에 숨은 다른 의미가 있다면, 과연 사랑을 편하고 가볍게만 받아들이고 일회용품처럼 소비되는 현대산업사회에 대한 교과서적 비판뿐일까 하는 의문은 여전히 무겁게 남는다.



80~90년대엔 충동적 분위기와 상황에서 발생하는 ‘바캉스 베이비’ 등이 심각한 사회현상의 하나로 대두된 적이 있었다. 이 시대라고 해서 비슷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인데 요즘은 그 어디에서도 이슈화하지 않는 걸보면 다들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어서일까, 이 또한 격세지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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