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호르몬/정명희



벚나무가 화사한 봄으로 인도한다. 길게 이어진 오르막길이 온통 연분홍으로 물들어간다. 카페 앞 나무 아래 놓인 의자는 활짝 핀 벚꽃으로 온통 사진 찍기 좋은 명소가 된 듯 사람들로 북적인다. ‘벚꽃 마켓’을 연다는 현수막이 바람에 나부낀다. 살랑대는 마음으로 세미나장으로 핸들을 꺾는다.

파릇한 새순이 돋아나는 봄이면 늘 생각한다. 사람의 몸도 자동으로 새로워지면 어떨까하고, 늙지 않고 몸도 마음도 항상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보았으리라.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 몸을 얼마나 잘 관리하는가에 따라 노화를 늦출 수 있다. 그중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이 여성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를 데리고 외래 진료 온 할머니는 깜빡깜빡한다고 호소하신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단기기억력이 떨어져 곤란하다고. 에스트로겐이라는 호르몬은 정신기능에 직접 작용하는 것으로 최근의 연구는 보고한다.

특히 언어 기억에 많은 작용을 한다고 알려져서 어떤 이는 치매와 알츠하이머병의 예방과 치료에도 효과 있다고 주장한다. 단어와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아 손을 흔들다가 머리를 두드리는 어른들에게 절실한 호르몬, 바로 에스트로겐이다.

조금이라도 덜 늙고 피부 탄력을 유지하려면 무엇보다 스트레스를 줄이고 여성 호르몬이 풍부한 음식을 섭취하며 숙면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에스트로겐을 엄마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연구자도 있다. 집안에 엄마가 있으면 식구들이 안정감이 있고 따스한 온기가 돌고 알게 모르게 행복한 기운이 퍼져나가지 않던가. 그렇게 집안에 엄마가 있으면 안정이 되듯이 이 호르몬이 있어야 뼈가 숭숭 바람이 들지 않고 잘 부서지기 쉬운 상태가 되지 않게 되니 말이다. 그러니 엄마를 지키듯이 뼈를 튼튼하게 해주는 호르몬과 생활 습관을 잘 익혀서 항상 즐겁게 행복하게 두 발로 걸으면서 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면서 우리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지 않던가. 그 행복이란 것은 어쩌면 마음먹기에 달려있지 않을까.

아들 내외가 다녀갔다. 지난해 혼인을 하고 바로 미국으로 간 아이라서 마음으로는 늘 걱정이 되었다. 신혼인데 집안 살림살이는 어떻게 하는지, 먼 타국에서 생활을 잘 하는지 궁금했지만, 아들 며느리 모두 즐거운 표정이라 내심 다행스럽게 여겼다. 많이 힘들 것인데도 내색하지 않고 그곳에서 생활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식사를 하다 문득 사진 한장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나무 바닥에 나란히 펼쳐서 전개해 놓은 커다란 박스와 널찍한 수건이었다. 그 위에 베개가 두 개 놓여 있었다. 바닥에 박스로 만든 신혼 침대였다.

처음 도착하여 살펴보니 신혼집에 40파운드 넘는 가구는 아파트 관리실에서 받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배달되어 있지 않고 작은 실내등 하나와 바닥만 있었다니 어디에다가 잠자리를 마련해야 하지 않았으랴.

신혼의 그 둘이서 의견일치를 보았단다. 뉴욕의 호텔은 너무 비싸니 박스를 뜯어서 깔고 이불 대신 수건을 덮고 자기로. 낮과 밤의 시차에 얼마나 피곤하였겠는가. 마룻바닥에 박스를 깔고 수건을 덮고서 잠은 청하는 신혼부부. 그 사진을 보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노릇 제대로 못 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 모습에 둘은 손사래를 치면서 그때 정말 달콤하게 잘 잤다고 천진한 표정으로 웃는다.

아들이 덧붙이기를, 그때 바닥에 누워서 떠올린 장면은 어렸을 적 미국에 도착한 첫날 밤이었다고 그때도 도착해보니 그야말로 집만 있었다. 사방 벽과 바닥만 있고 전기도 수도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는 아이들을 이민 가방에서 꺼낸 옷과 홑이불로 잠자리를 만들어 바닥에 재웠었다. 그리고 사흘 동안 밥을 할 수 없어서 ‘인 앤 아웃’ 이라는 햄버거로 식사를 해결했다.

아이는 그때 그 순간에 정말 꿀 같은 단잠을 자면서 먹고 싶은 것 마음껏 먹었다고 회상한다. 아이의 기억 속에 힘든 순간이 아름답게 저장되어 있었던가 보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서도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진 신혼집을 꿈꾸지 않고 스스로 하나하나 만들어서 조립해나가는 신혼가구로 집을 꾸미면서 나름의 행복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싶다. 말없이 따르는 며느리가 누구보다 대견하고 사랑스럽다. 힘들었던 순간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채색되어 지워지지 않는 그네만의 향기를 더해 가리라.

미완성의 집을 나름의 취향으로 꾸미고 색깔을 넣고 오감으로 버무려 만족감을 더해가는 아이들처럼, 늘 우리의 일상이 엄마 호르몬이 넘쳐나는 향기로운 생활이기를 빈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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