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歌/ 안중근

丈夫處世兮(장부처세혜) 其志大矣(기지대의)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時造英雄兮(시조영웅혜) 英雄造時(영웅조시)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가, 영웅이 시대를 만드노니/ 雄視天下兮(웅시천하혜) 何日成業(하일성업)/ 세상을 크게 바라보지만, 언제나 대업을 이룰 것인가

東風漸寒兮(동풍점한혜) 壯士義熱(장사의열) 동풍은 점점 차가워지는데 장부의 의열은 뜨거워지나니/ 憤慨一去兮(분개일거혜) 必成目的(필성목적) 분개하여 한번 시작한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겠노라

................................................................

이 한시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거사를 앞두고 쓴 출사표라 할 수 있는 작품으로 ‘하얼빈歌’와 함께 전해진다. 이토를 저격하기로 결심하고 꼭 그 뜻을 이루고자 스스로에게 다짐한 맹세의 혈서와도 같다. 여기서 ‘東風’은 일본의 야욕을 뜻한다. ‘분개하여 한번 시작한다면 반드시 목적을 이루겠노라’ 그 결기가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7발의 총성이 하얼빈시 중심가에 위치한 역 플랫폼에 울렸다. 세 발의 총알이 폐와 복부에 박힌 이토가 나무토막 넘어지듯 쓰러졌다. 110년 전의 일이다.

그해 1월 안 의사와 동지 11명이 왼손 약지를 끊어 구국 단지혈맹을 맺고 동의단지회를 결성, 조국의 독립 회복과 동양평화를 맹세한 지 9개월 만의 거사였다. 안 의사의 브라우닝 7연발 권총에는 약실에 한 발, 탄창에 일곱 발 정확히 8발이 장전됐다. 거사 직후 러시아 헌병들에 의해 체포된 안 의사는 권총을 공중으로 내던지고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세 번 외쳤다. 다음날 러시아 신문은 ‘노예로 전락한 조국으로 인해 모욕을 당한 한국인의 정조준 된 탄환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정복한 이토 공을 쓰러뜨렸다’고 보도했다.

안 의사의 의거는 1911년 중국의 청조를 타도한 신해혁명 참가자들에게도 큰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자신의 몸을 던져 구국 의지를 실천한 모범사례로 그들 가슴에도 또렷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개혁 성향의 신문인 상하이의 민우일보는 이토 저격에 대해 연속 5편의 사설과 19편의 기사를 실었다. 상하이에서 활동한 개혁파 사상가 ‘장타이옌’은 ‘조선의 안중근, 아시아의 안중근도 아니요, 세계의 안중근’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훗날 중국의 대표적 문인 ‘파진’도 ‘안중근은 나의 젊은 날의 영웅’이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당파를 초월해 안 의사를 중국의 민족 영웅에 버금가는 반열에 오르게 했다. 수많은 학생들이 안 의사를 소재로 한 연극을 만들어 공연했다. 周恩來 전 총리와 그의 부인도 톈진에서의 학창시절 안중근 연극에 함께 출연한 적이 있다. 저우언라이는 “중국과 한국이 손잡고 함께 벌인 항일 투쟁은 바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강조하였다. 오늘날에도 안 의사에 대한 추모 열기는 식지 않고 있다. 하얼빈에서는 해마다 순국일과 의거일이 되면 거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좌담회와 공연 등이 열린다.

그 추모 열기는 훗날 일본에까지 이어졌다. 숭모모임이 만들어지고 여러 종류의 전기가 출간되었다. 물론 일부 양식 있는 지식인에 국한된 것이겠지만, 그들에게도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동양평화를 염원했던 진정한 평화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안 의사가 옥중 집필한 ‘동양평화론’의 사상적 가치, 그리고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세계 최초의 블록경제론을 제시한 경제학자로서의 면모도 제대로 평가받아야겠다.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저작권자 © 대구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