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운석

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

건강을 위해 하루 1만 보 걷기를 목표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코로나19 여파로 헬스 등 실내운동에 제약을 받아 걷기 마니아가 더 늘어난 원인도 있겠다. 아침저녁으로 대구 도심을 가로지르는 신천을 따라 마스크를 걸친 채 종종걸음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 해가 지고나면 인근 학교 운동장을 도는 운동족들도 많다. 이들 중 상당수는 하루 1만 보 걷기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일 게다.

그런데 왜 하필 하루 1만 보일까? 알게 모르게 하루 1만 보 걷기가 건강의 기준이 되었는데 의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걸까?

1만 보라는 기준은 사실 ‘만보계’(萬步計)라는 이름으로 일본의 한 회사가 판매한 상품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의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수치가 아니라 마케팅 차원에서 붙인 이름이 건강의 기준점이 돼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과연 하루 1만 보 이상을 걸어야 건강해지는 걸까. 미국 하버드대학교 부속 병원인 브리검여성병원의 연구팀이 조사한 결과가 있다. 지난해 이 연구팀은 평균 나이 72세인 노인 여성 1만7천여 명을 대상으로 약 4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하루 평균 4천400보를 걷는 그룹은 2천700보를 걷는 그룹에 비해 사망률이 41%나 낮았다는 것이다. 사망률은 많이 걸을수록 낮아지는데 7천500보 이상부터는 더 낮아지지 않았다.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하루 7천500보 걷기면 충분하며 1만 보 이상 걷는다고 해서 추가적인 효과는 없다는 걸 보여준다. 걷기 싫어 미적대는 사람들에겐 좋은 핑계거리다.

‘1만 보’처럼 무의식적으로 미리 각인된 정보를 기준점으로 삼아 판단하려 하는 경향을 ‘기준점 효과’라고 한다. 배의 닻을 의미하는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라고도 한다. 배가 닻을 내리면 이 닻에 묶인 밧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수 있다. 처음에 접한 정보가 기준점이 되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때론 알게 모르게 접한 사물에 대한 인상이 정박한 배의 닻 역할을 해 잘못된 판단으로 이끄는 현상을 말하기도 한다.

기준점 효과는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동창회가 대표적이다. 모임이 열리는 장소 입구에는 대부분 회비를 내는 장부가 비치돼 있다. 공식적인 회비는 5만 원이지만 일부러 누군가가 제일 위쪽에 10만 원을 적어놓으면 이것이 기준점이 돼 대부분 10만 원 이상을 내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최초에 접한 정보가 기준점으로 작용한 결과다.

요즘은 모든 분야,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잘못된 기준점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뜨거운 이슈가 된 부동산 문제를 보자. 올해 초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신입사원 채용계획이 있는 기업 831개사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신입사원 예상 초임 연봉은 평균 3천382만 원이다. 그런데 지금 뉴스에 나오는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 가격은 10억 원을 돌파했다. 서울에 살면서 아파트 한 채를 사려면 가족 모두가 월급 한 푼 쓰지 않고 11.4년을 모아야 한다는 통계까지 나왔다. 내집 마련의 기준점이 10억 원이다. 이 기준에 나를 대입시키면 박탈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처음에 접한 정보가 기준점이 돼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기준점 효과’는 우리 사회에서 흔하다. 지독한 진영논리가 대표적이다. 되돌아보면 모든 일에 내 편, 네 편으로 나뉘어 나라가 두 쪽이 났다. 조국 사태에서부터 검찰 개혁 문제를 두고 그랬다. 최근의 부동산 문제나 홍수의 원인을 둘러싼 양극화, 광복회장이 촉발한 친일 논쟁, 광화문 집회를 둘러싼 코로나19 확산 책임 공방까지 모두 좌우대립이 첨예하다.

문제는 자기가 서있는 곳이 기준점인줄 알기 때문이다. 자기 왼쪽은 빨갱이고, 자기 오른쪽은 보수꼴통이다. ‘걷기=1만 보’처럼 이미 굳어진 고정관념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다.

‘하루 1만 보’를 기준점으로 삼아 걷는다고 해서 건강에 해롭지는 않다. 하지만 좌우에 매몰되어 두 쪽으로 동강 난 진영논리라는 기준점은 이제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이 되고 말았다. 이 기준점을 바로잡아줄 어른이 필요한 시대다.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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