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기행 (80) 금관성의 파사석탑

발행일 2020-09-14 14:00:00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후가 대양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도와준 파사석탑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비 허황옥의 능이 있다. 허황옥은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꿈에 그리던 사랑을 찾아 배를 타고 대양을 건너 가야국에 당도해 왕비가 되었다. 당시 허황옥이 배를 타고 건너올 때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던 파사석탑을 모신 누각.
삼국유사에 기록된 금관성의 파사석탑과 김수로왕, 허황후의 이야기는 설화에 가까운 사실적인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

김수로왕이 6가야국 왕들과 함께 황금알에서 태어났다는 것, 미리 왕비가 될 여인이 나타날 것을 알고 신하들이 왕비를 추대하려는 것을 거절했다는 것, 왕과 왕비가 158세, 157세까지 살았다는 것 등이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실존했던 인물이라는 것과 파사석탑이 엄연히 지금까지 가야의 땅에 현존하고 있다는 것이 모두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이 삼국유사의 기록을 흥미롭게 하고, 지속적으로 연구하게 한다.

설화 속의 파사석탑을 찾아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 줄 문화콘텐츠의 씨앗이 될 새로운 이야기를 꾸며본다.

경남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파사석탑. 석탑의 조각을 지니고 있으면 풍랑을 만나도 안전하다는 믿음 때문에 바다로 가는 사람들이 석탑의 조각을 떼어가는 바람에 많이 훼손됐다는 파사석탑.
◆삼국유사: 금관성의 파사석탑

금관성 호계사 파사석탑은 이 마을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 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서역의 아유타국으로부터 싣고 온 것이다. 동한시대 건무 24년 갑신년(48)의 일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고 바다에 나가 동쪽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겨내지 못하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 탑을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제대로 건너와 남쪽 언덕에 와서 정박했는데 비단 돛에 붉은 깃발 그리고 붉은 구슬 같은 아름다운 물건이 함께 있었다. 지금은 그곳을 주포라 한다.

처음으로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벗은 곳은 능현, 처음으로 붉은 깃발이 바닷가에 들어온 곳은 기출변이라 부른다. 수로왕은 허황옥을 정중히 모셔 들여 함께 150여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우리나라(고려)에는 절을 짓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이르지 않았고, 사람들이 기꺼이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락국 본기에도 절을 지었다는 기록이 없다.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 사랑을 찾아 대양을 건너와 김수로왕의 비가 되어 157세까지 살았던 허황후의 능.
가야국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년(452)에 이르러 그 땅에 절을 지었고 또 왕후사를 창건해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다. 아울러 남쪽 왜구를 진압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탑은 네모나게 4면이요, 5층인데 조각한 모양새가 매우 기이하다. 돌에는 엷게 붉은색 무늬가 있고, 바탕이 아주 부드럽다. 이 지역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신농본초에 ‘닭 벼슬의 피를 찍어 시험한다’ 함이 이 것이다.

금관국은 가락국이라고도 하고, 가락국 본기에 모두 실려 있다.

석탑 실은 비단 돛배 붉은 깃발도 가벼이/ 신령께 빌어 험한 파도 헤치고 왔네/ 여기까지 이르려 한 허황옥만 도왔으랴/ 오래도록 남쪽 왜구의 침략을 막아주었네.

허황후의 능 서편에 조성된 솔밭.
◆금관성 파사석탑

파사석탑은 경남 문화재 자료 제227호로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가야시대에 조성된 이형 석탑이다. 김수로왕의 비 허황후가 인도에서 올 때 배에 실어왔다는 돌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석질로 조성된 5층 석탑이다.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가 배필을 찾아 배를 타고 거친 파도를 헤치며 항해를 시작했다. 풍랑을 만나 항해에 실패를 거듭하자 파도를 잠재우는 신령스런 힘을 가진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가락국에 도착해 김수로왕을 만나 왕비가 되었다.

허황후가 타고 온 배는 발굴 결과 배의 나뭇조각을 통해 최소 15m 크기로 30여 명이 탈 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아유타국, 인도와 가야의 교류가 있었다는 것은 학자들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가야지방의 고분에서 발견된 인골을 분석한 결과 인도인의 DNA와 비슷한 DNA가 나왔다는 것과 인도 미쉬라의 궁에 허황후의 초상이 걸려 있고, 출생지가 표시되어 있다는 것. 언어학계에서도 한국어와 인도의 타밀어에 발음이 같거나 의미가 같은 단어들이 400~500개나 있어 가야와 인도는 어떠한 형태로든 교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허황후의 능 앞으로 조성된 공원.
학계에서는 또 설화와 다른 의견을 주장하기도 한다. 2천 년 전에 수개월이 걸리는 대양을 건너온다는 것에 시간적, 공간적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파사석이 신비한 힘을 가졌다는 것보다 배의 무게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하는 평형석의 기능을 했을 것으로 분석한다.

파사석탑의 석질은 우리나라에서 잘 나지 않는 돌인 파사석으로 구성됐다. 인도 남부지방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돌이다. 파사석은 본초강목에 일종의 약재로 해독작용을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태우면 유황냄새가 나고 닭 벼슬의 피를 묻히면 응고되지 않고 피가 물로 변하는 특징이 있다.

또 파사석탑의 조각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풍랑을 만나도 안전하다는 설이 전해지면서 어부들이 바다로 나갈 때 파사석탑의 돌을 깨어가면서 석탑이 본래의 모습에서 많이 훼손된 상황이라는 분석이다.

김수로왕릉의 홍살문.
◆새로 쓰는 삼국유사: 파사석탑의 은혜

인도에 천 년을 함께 살아온 거북이 칠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바다의 용왕도, 지상의 황제도 부러워하지 않으며 우의가 좋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칠형제 중 막내가 용왕이 아끼는 닭을 모르고 잡아먹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아차린 용왕이 거북이 칠형제를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돌로 만들어버렸다.

돌이 되어버린 거북이 칠형제는 비 오는 날에야 깨어나 하늘에 하소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천 년이나 먹고 살던 대로 했을 뿐인데 용왕님의 미움으로 꼼짝도 할 수 없는 돌이 되어버렸습니다. 억울함을 풀어주십시오”라고 빌었다.

상제도 용왕의 뜻에 반한 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너희들이 내가 시키는 일을 해준다면 마음대로 나다닐 수는 없어도 뜻대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김수로왕릉으로 들어가는 중문.
거북이 형제들은 상제의 뜻에 따라 인도 아유타국 공주를 안전하게 대양을 건널 수 있도록 용왕 몰래 배에 올라 100일이나 거친 항해를 하면서 배의 중심을 잡아주는 일을 했다.

김수로왕은 왕비를 맞아 나라 전체에 잔치를 베풀었다. 또 상제의 말을 들어 허황후를 안전하게 데려온 거북이 형제를 왕궁의 뜰에 모시고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닭을 잡아 제를 올리는 의례를 갖추었다.

용왕은 거북이 칠형제가 가야국으로 몰래 들어간 것을 알고 닭 잡는 인부들을 못살게 굴었다. 허기진 거북이들은 다시 용왕에게 하소연했다.

용왕은 거북이 형제들의 간절한 마음을 받아주기로 했다. 대신 닭을 잡아먹었던 막내가 용궁에서 매일 아침 시간을 알리는 문지기가 되기로 하고, 거북이들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모든 감정을 풀기로 했다.

가야의 시조로 알에서 깨어나 158세까지 살면서 가야를 다스렸다는 전설을 가진 김수로왕의 능.
이후 가야국에서 겨울이 지나고 본격적인 어업을 시작하는 이월 초하루에 파사석탑 앞에서 거창한 제를 올렸다. 풍랑이 일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많은 고기를 잡아 잘 살 수 있게 해주길 기원하는 제를 올렸던 것이다.

파사석탑으로 이름 지어진 거북이 칠형제는 허황후의 후손인 가야국 왕들의 소원은 하늘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그대로 들어주었다.

특히 바다의 일을 부탁하는 일이라면 어김없이 소원을 들어주는 파사석탑의 영험함은 가야국 전체로 퍼져나가 백성들 모두가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다. 이로 인해 바다로 나가는 백성들은 닭을 잡아 파사석탑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

세월이 지나면서 파사석탑에 대한 전설은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다. 석탑의 조각을 품에 안고 바다로 나가면 아무리 거친 풍랑이 일어도 안전하다는 소문이 번졌다. 이 때문에 바다로 나가는 사람은 남몰래 파사석탑의 조각을 조금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급기야 석탑이 원형을 잃고 크게 훼손되면서 안전하던 가야국의 뱃길에도 다시 재난이 닥쳐왔다. 이러한 소문이 왕실에 전해지면서 파사석탑에 누구도 근접하지 못하도록 누각을 지어 보호하기 시작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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