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루이스 글릭

발행일 2020-10-25 14:41:59 댓글 0 글자 크기 키우기 글자 크기 줄이기 프린트
당신이 갑자기 죽은 후,/ 그동안 전혀 의견 일치가 되지 않던 친구들이/ 당신의 사람됨에 대해 동의한다./ 실내에 모인 가수들이 예행연습을 하듯/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당신은 공정하고 친절했으며 운 좋은 삶을 살았다고./ 박자나 화음은 맞지 않지만 그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진실하다./ 다행히 당신은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포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조문객들이 눈물을 닦으며 줄지어 나가기 시작하면,/ 왜냐하면 그런 날에는/ 전통 의식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9월의 늦은 오후인데도/ 햇빛이 놀랍도록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그때/ 당신은 갑자기/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한 질투를 느낄 것이다./ 살아 있는 당신의 친구들은 서로 포옹하며/ 길에 서서 잠시 얘기를 주고받는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저녁 산들바람이/ 여인들의 스카프를 헝클어뜨린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운 좋은 삶’의 의미이므로./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므로.

「시로 납치하다」 (더숲, 류시화 역, 2018)

애도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는 의미다. 사망소식을 접할 때 자동으로 나오는 정형화된 말이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이다. SNS에 부고가 올라오면 똑같은 애도문구가 줄줄이 이어진다. 그런 광경을 보고 그냥 넘어가긴 꺼림칙하다.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댓글을 달아주지 않으면 뭔가 찜찜하다. 허나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조금이나마 있어 명복을 빌어주는 것인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조문객이 많이 몰리는 장례식장이라고 해서 고인이 생전에 잘 살았다는 증거는 아닌 듯하다. 조화가 빽빽이 늘어선 상가라고 해서 애도마저 유달리 넘쳐 뵈진 않기 때문이다. 정승 댁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파리만 날린다는 속담이 생뚱맞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조문행렬이 고인을 애도하기 위한 줄이 아니라 상주에게 눈도장 찍기 위한 처세의식이라고 말한다면 조문객을 폄훼한 부적절한 언사이거나 지나치게 시니컬한 시각인 걸까. 아무래도 진정한 애도는 양보다는 질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자신의 죽음을 진정 슬퍼해주고 명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다면 인생을 헛되이 살지 않았으리니.

죽고 나면 다들 칭찬에 너그러워진다.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연기가 아니다. 존재가 없으므로 경쟁상대도 아니고 질투나 시기할 필요도 없다. 죽은 다음 아무리 좋은 평가를 받아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눈물은 죽음 앞에 오는 조건반사이거나 두려움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거짓은 아니다. 고인이 살아서 그 모습을 봤다면 의외의 상황에 겁먹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늘가에는 뭉게구름이 떠가고 파란하늘엔 햇살이 빛난다. 코스모스가 길가에서 화사하게 고개를 들고 지나가던 연인이 그 앞에 멈춰 선다.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 고인에겐 다시 누릴 수 없는 환상이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불어도 좋다. 서로 포옹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모습이 부럽다. 억울하고 질투를 느낄 일이다. 그냥 숨 쉬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 ‘운 좋은 삶’이라는 의미다. 당신에게 가장 ‘운 좋은 일’은 살아있다는 사실이고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때는 지금이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시인이라고 특별한 정서를 가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오철환(문인)

<저작권자ⓒ 대구·경북 대표지역언론 대구일보 .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댓글 (0)
※ 댓글 작성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책임을 담아 댓글 환경에 동참에 주세요.

많이 본 대구뉴스

많이 본 경북뉴스